한·중 밀월과 현실 직시 모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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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정상회담은 사랑의 열병처럼 강렬했다. 한국 TV의 9시 뉴스에 해당하는 CC-TV(중국중앙TV)의 저녁 메인 뉴스 ‘신원롄보(新聞聯播)’는 전체 25분 보도 중에서 무려 8분30초를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관련 보도에 할애했다. 중요한 외국 정상의 방중 보도가 대개 2~3분 정도인 걸 고려하면 파격이다. 양측은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 ‘감성 외교’를 과시했다. 한국은 신심지려(信心之旅)라 했고, 중국 외교부는 박 대통령을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라고 칭했다.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겪으며 한국에 일었던 ‘반중 감정’이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중국인들이 한국팀보다 일본팀을 응원하던 ‘혐한 감정’을 떠올리면 한·중이 원래 이렇게 가까웠나 머리가 갸우뚱거려진다.

홍콩 봉황TV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박 대통령 방중의 가장 큰 목적으로 ‘경제 협력’(65%)을 꼽았다. ‘한·중이 가까워지는 게 한·미 동맹을 약화시킬 것으로 보느냐’라는 질문에 대다수(82%)의 중국인은 그럴 가능성을 일축했다. 중국인들은 로맨스(?)를 하되 두 눈으로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한 시사평론가는 한·중 정상회담의 성격을 ‘전략적’이라고 정의했다. 양국이 서로의 관계를 아름다운 감성적 수사(修辭)로 도배하긴 했지만, 그 밑에 사실 각자의 전략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이번 정상회담은 대외에 ‘보여주기’ 위한 과시성 성격이 강했다. 중국 측에선 중·일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일본의 역사 왜곡, 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 한국이 중국과 공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이런 표현을 집어넣길 원했고, 한국 측은 완곡히 거절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은 한·중 로맨스를 북한에 보여주고 싶어했을 것이다. 최근 악화된 북·중 관계 속에서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이참에 아예 기세를 몰아 중국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도록 대중 관계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한·중 양측은 자신들의 로맨스가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이를 통해 한·미·일 협력 관계를 약화시키려 하지만, 한국은 종종 한국을 따돌리고 북·미 대화를 했던 미국이 자신을 좀 더 존중해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중이 서로의 가장 기본적인 ‘니즈(needs)’를 존중해 주느냐다. 한국이 중국에 바라는 건 남북관계에서 한국을 지지해 주고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을 중국이 도와주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 문제를 진정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에 대해선 의구심이 여전하다.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중국은 여전히 ‘북한 카드’를 외교·안보의 지렛대로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중국은 최근 북한과도 ‘전략 대화’를 강화함으로써 최근 소홀해진 북·중 관계를 복원했다. 중국이 남북한 양쪽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2개 국가 정책’을 펼친다는 분석이 베이징 외교가에서 나온다. 중국 측은 북한 문제 때문에 한국이 대중 관계를 강화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또 한·미·일 관계에서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한국이 미국에서 멀어져 중국 편으로 다가오기를 바란다. 한·중이 ‘진짜 사랑’에 빠질 게 아니라면 지금부터는 ‘현실 직시 모드’를 되찾는 게 바람직할지 모른다.

boston.su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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