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80년이후 첫 앨범 내는 가수 이용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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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무대를 떠나 있던 20여년동안 언제나 노래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태웠습니다. 하지만 과거 숱하게 겪었던 시각장애에 대한 따가운 눈총과 편견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 쉽게 재기를 꿈꾸지 못했습니다"

혼의 깊은 떨림이 보일 정도로 노래해 1970년대의 심금을 울렸던 가수 이용복(李容馥.52)씨. 검은 안경의 시각장애인 가수로 유명한 그가 강산이 두번 반이나 바뀐 지금 팬들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남한강 둔치에 세워진 비행기 카페 '이용복의 집'에서 만난 그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울긋불긋 화려한 셔츠에 붉은색 재킷. 예의 검정안경을 낀 미소 띤 얼굴. 맑고 환하면서도 뭔가 꽃그늘 지는 듯한 목소리. 아직 젊음을 간직한 그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세월을 잊게 한다.

李씨가 아내와 함께 비행기카페를 연 것은 2001년 11월. 길이 55.4m, 최대 탑승인원 3백20명 규모인 DC-10 여객기를 옮겨 카페로 개조한 것이다.

중앙에 피아노가 있고 3평 규모의 조그만 무대를 설치한 것 외에는 여객기 구조 그대로다. 남녀 직원들도 승무원 복장으로 음식을 나르며 여객기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李씨는 하루 두세 차례 무대에 올라 자신의 히트곡인 '그 얼굴에 햇살이''어린 시절''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등을 들려준다. 자정을 훨씬 넘긴 새벽에도 멀리서 찾아온 팬이나 단체손님 등이 원한다면 피곤함을 마다 않고 무대에 서는 일이 다반사다.

오로지 가창력으로만 승부하는 그는 무대에 오르겠다는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경우에도 노래실력이 모자라면 사절한다.

가수생활을 접은 뒤 서울에서 녹음실을 운영하며 조용히 제2의 인생을 살던 李씨가 양평으로 내려온 것은 2000년 6월. 1978년 '아낙'이라는 음반을 끝으로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마치고 녹음실을 열어 후배 양성에 전념하던 그가 마침내 음악과의 완전 결별을 선언한 것.

그 사이 부활.샤크라.영턱스 클럽 등 쟁쟁한 후배들의 앨범 녹음작업을 맡아 음반제작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 양평으로 왔다.

그러나 용문산 아래 좋은 환경에서 인심 좋은 이웃과 벗하는 생활도 李씨를 그리 오래 자유인으로 놓아두지 못했다.

"전원생활이 한동안은 좋았어요. 이웃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밤을 새워 이야기 꽃을 피우는 재미도 그만이었죠. 하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과 팬들과의 만남에 대한 목마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만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잖은 나이에 다시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1년여 동안 카페 무대에 오르며 노래에 대한 갈증을 풀던 그는 요즘 25년 만에 새롭게 선보일 앨범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글재주가 뛰어난 아내가 써준 가사 8곡을 중심으로 자신이 직접 작곡한 11곡을 맹연습 중이다. 카페 옆에 지은 3평 짜리 녹음실에 틈나는 대로 들러 3개월째 앨범을 준비하고 있는 것. 이르면 다음달 중 신곡을 발표하고 대중 앞에 화려하게 컴백한다는 목표다.

"무대를 떠나 있던 20여년 동안 언제나 노래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태웠습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자에 대한 따가운 눈총과 편견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쉽게 재기를 꿈꾸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도 정신적으로 여유가 많이 생긴 데다 장애인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도 예전보단 한결 좋아져 자신을 갖고 새로 도전해 보기로 한 거죠."

과거 활동 당시 李씨가 겪어야 했던 차별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70년대에는 그가 발표한 노래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고 우울하다'는 등의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금지곡으로 선정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74년 '어린 시절'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당시에는 한 방송사의 연말 가수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잇따랐지만 '장애인이어서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80년대 들어서도 고통은 계속됐다. 당시 한 실력자의 부인이 "저 사람이 나오면 보기가 싫다"는 반응을 보이자 모든 방송에서 일제히 그에 대한 출연섭외를 중단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이 같은 냉대에 시달린 나머지 외국으로 나가 가수활동을 계속할까를 고민하며 무대를 떠났던 그가 컴백을 준비 중이다. 그가 용기를 다져 먹는 데는 장애인 팬들의 열화와 같은 재기 요청도 한몫했다.

"장애는 단지 생활하는 데 다소 불편이 따를 뿐이지 정신이 병든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자랑도 아니지만 창피한 일도 아닌 장애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팬들의 넓은 사랑을 기대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전익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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