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세 선배님 나가주세요 … 불황에 정년 깎는 로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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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국내 대형 로펌들이 잇따라 소속 변호사의 정년제를 신설하거나 기존의 정년을 60~65세로 하향 조정하고 있다. 경기 불황의 여파가 ‘정년이 없다’는 변호사 업계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무법인 대륙아주는 올해 초 65세 정년 규정을 신설했다. 화우는 최근 63세, 로고스도 2009년 65세 정년을 각각 도입했다. 태평양은 1980년 설립 당시 65세였던 정년을 2009년 60세로 단축한 바 있다. 일부 로펌은 아예 창립 때부터 정년을 65세로 정해 시행하고 있다. 세종·율촌·바른 등이 그렇다. 김앤장·광장·지평지성 등은 정년 관련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정년 규정이 없는 로펌들 일부도 최근 정년제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로펌 규모가 커지고 점점 기업화하면서 변호사 정년을 도입하거나 낮추는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로펌에선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해당 로펌 변호사는 “연봉 공개를 꺼리는 업계 특성상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55세부터 매년 20%씩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며 “60세가 되면 신입 변호사와 같은 연봉을 받게 돼 사실상 나가란 압박을 받는다”고 전했다.

 사실 국내 로펌 소속 변호사들의 정년은 일반 기업의 임직원들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60세 정년 의무화’ 법안이 올 4월 국회를 통과하는 등 최근 우리 사회의 정년 연장 추세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대형 로펌의 경영담당 대표 변호사는 “인사 적체 해소 차원에서 정년을 감축했다”며 “시장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등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년 감축 추세의 원인으론 경기 불황이 첫손에 꼽힌다. 최근 들어 로펌 상황은 더 나빠졌다. 부동산·기업 파이낸싱(금융)·M&A 분야 등의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외국계 로펌들의 국내 시장 진출에 대비해 변호사 수를 경쟁적으로 확충해 오면서 비용은 줄지 않는 구조다. 특히 지난해부터 로스쿨 졸업생이 매년 1500명씩 쏟아지는 등 시장 환경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신규 변호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선배들의 입지가 좁아졌다”며 “정년 감축은 열심히 안 하면 도태될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최대 고객인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연령대가 40·50대로 젊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정년 감축을 둘러싸고 선후배 간 갈등도 일어난다. 일부 로펌에선 실무를 주로 맡는 젊은 변호사들이 고액 연봉을 받는 전관 출신 선배 변호사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 로펌의 한 30대 변호사는 “고객은 로펌을 보고 찾아오지 변호사를 보고 찾아오는 게 아니다”며 “자리만 지키는 파트너급 변호사들이 왜 실제 현장을 뛰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 대형 로펌이 요즘 추세와 달리 정년을 연장하려다가 젊은 변호사들의 반발로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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