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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횃불|3·1 운동 반세기에 펼치는 특집 시리즈 ⑤| 문화적 측면에서 본 3·1 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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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1운동을 재평가·재해석해야 될 시기가 이제는 왔다. 그것은 3·1 운동도 올해 들어 반세기의 세월이 지났고, 이 반세기 동안 누구나 3·1운동을 독립운동이라는 고정된 해석으로써만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새시대」향한 진군>
3·1운동은 물론 독립 운동이다. 그러나 3·1운동을 독립 운동이라는 한 가지 고정된 관념으로서만 생각해 버린다면 우리는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나타난 1920년대 이후의 우리 한국 사회의 급격한 근대화 작업을 충분히 해석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3·1 운동은 이것을 봉기시킨 그 민족적 감정이나 이 운동의 종국적 목적이 나가 다같이 독립이라는 두 낱말에 기본적인 동기를 두고 있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기간으로 해서 한국의 본격적인 근대적 진군이 이루어 졌다는 것은 3·1 운동이었다는데 더 큰 원인이 있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3·1 운동이 역사의식의 발로가 아니었다면 3·1 운동은 무질서한 감정적 충격에만 그쳤지 질서 있는 자각적 행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을 것이며, 3·1 운동의 정신을 그 후의 근대화 작업으로 이끌고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3·1 운동의 정신을 문화 운동의 형태로 전개시켜 나간 그 후의 제반 사정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3·1 운동을 재해석·재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문화적 측면이다. 여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3·1 운동을 독립운동이라고 볼 때 그 독립운동은 적어도 일제 지배 하의 국내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계속될 수는 없었다. 이 독립운동을 다른 형태로 계속시킨 것이 문화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운동 성격 짙어>
둘째는, 3·1 운동이 독립 운동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적 성격보다는 정신운동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 3·1 운동의 정신은 문화 운동을 통해서 더 많이 발현될 수밖에는 없었다.
셋째는, 3·1 운동 이후에 좀더 본격적으로 전개된 문화 운동은 사실상 3·1 운동이 직접적인 동기와 계기가 되었던 때문이다. 이러한 세가지 이유에서 3·1 운동의 문화적 측면은 극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인데 3·1 운동이 지닌 이러한 문화적 의의를 좀더 선명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3·1 운동을 계기로 해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문화적 기상이 어떻게 서로 달라졌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지적되는 것은 언론 활동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그 이전의 일제의 무단 정책이 문화 정책으로 변경됨에 따라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본격적인 일간신문과 월간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3·1 운동 이전에도 물론 일간신문과 월간 잡지들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그 근대적 성격이 미약했던 것이며 그 종류도 몇가지 밖에는 안되었던 것이다. 3·1 운동 이후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적 형태의 일간 민간 신문이었으며, 이들의 창간을 전후하여 실로 많은 각종의 월간 잡지들이 창간되어 근대적인「저널리즘」이 이 땅에 형식 되어 갔다.

<유형 무형의 목표들>
이것은 3·1 운동을 계기로 해서 근대적인 언론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3·1 운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언론 활동은 물론 근대적인「저널리즘」의 형성이라는 우리민족의 근대적 자각이 그 기초가 된 것이기는 하지만, 3·1 운동의 정신을 언론 활동을 통하여 계속 추진시켜 보려는 민족적 과제가 그 유형 무형의 목표였던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3·1 운동 이후부터 새로 시작된 신문학 운동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신문학 운동은 이인직·이해조 등의 신소설 운동에서부터 그 싹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최남선·이광수 2인 문단시대에 신문학 운동이라는 좀더 정돈된 문학 운동으로 발전했었다. 이때의 최남선·이광수 2인 중심의 신문학 운동을 전기 신문학 운동이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이 전기 신문학 운동은 아직도 근대적 성격이 미흡한 일종의 계몽 문학 운동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언문일치 운동을 주장 실천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구어체 문장이 확립된 것은 아니었고, 신체시가 발표되기는 했지만 근대시로서의 체제는 너무나 미약했고 몇 개의 단편소설과 장편「무정」이 이광수에 의해서 시험 발표되기는 했지만 근대소설의 제 조건을 아직도 충분히 갖춘 것은 아니었다.

<다양해진 문예사조>
이러한 상태의 우리의 문학이 3·1 운동 이후의 새로운 신문학 운동 즉 후기 신문학 운동에 들어서서는 모든 양상을 일변시켰다. 그 일변된 기상을 요약하면,
①최남선 이광수 2인 중심의 문단이「창조」「백조」「폐허」「금성」「개벽」「조선 문단」등 다수동인지 문단으로 변했고
②종전의 계몽주의 문학 운동이 낭만주의니 자연주의니 상징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다양한 근대적 문예사조로 전개되었고
③종전의 미약한 근대적 성격을 보강한 근대시와 근대적인 소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3·1 운동이 계기가 되어 문학이 비약적인 발전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을 의미해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의해야 할것은 전기 신문학 운동에 있어서는 근대화(당시의 용어로는 개화)와 자주독립이라는 2대 목표가 뚜렷이 제기되어 있은 데 비하여 3·1 운동 이후의 후기 신문학 운동에 있어서는 그러한 사회적 이념보다도 순문학 운동이라는 문학적 의욕이 더 전면에 내세워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후기 신문학 운동이 전기의 계몽주의적 성격을 정면에서 반대하고 나선 운동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주의해 볼 점이라는 것은, 이점이 어쩌면 후기 신문학 운동이 3·1 운동의 정신과는 별개로 일어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점이기 때문이다.

<후기선 자아 내세워>
자주독립이라는 3·1 운동의 기본 정신과는 달리 순문학이라는 기치를 3·1 운동 직후에 일어난 후기 신문학 운동이 내걸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3·1 운동의 정신이란 자주독립과 함께 민권 신장·자유주의·민주주의 등과 같은 근대 정신의 추구와 실현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 선언문의 여러 구절에서도 발견된 이와 같은 근대 정신의 확립은 문학적 측면에서는 문학의 근대화가 된다. 문학의 근대화가 사회적·민족적 근대화가 되며, 그것이 자주 독립의 문화적·정신적 기초가 된다.
이러한 자각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학 의식에 작용되어 계몽주의적인 전근대적인 전기 신문학 운동에 반대한 순문학 운동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3·1 운동 직후에 나타난 순문학 운동은 그것이 그대로 본격적인 근대문학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3·1 운동 이후에 나타난 우리 문학에는 자주독립을 직접적으로 그 주제로 내세우는 경향보다는 자아의식, 개성의 자각, 사회 의식, 개인의 기본 권리, 인간의 희비애락 등과 같은 인간적 기조가 좀더 문학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모든 것이 3·1 운동의 정신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술 활동 새 분야에>
1920년대에 스며있는 그 많은 애조와 절망적 색감은 모두가 간접적인 3·1 정신의 별도의 표현 형태이기도 했던 것이다.
셋째는 3·1 운동을 계기로 해서 문학 이외의 다른 여러 자매 예술이 또한 그 근대적 전진을 꾀했다는 점이다.
①미술 분야를 살펴보면 3·1 운동 이전엔 재래의 동양화만이 성행해 왔으며 다시 춘곡 고희동씨의 양화 시험이 있었을 뿐 새로운 미술 활동은 거의 없었다. 3·1 운동 이후에 들어와서 전기한 고희동씨를 필두로 이종우, 김관호, 나혜석 등의 새로운 양화가가 등장하여 새로운 미술 활동이 시작되었고, 1922년 이후「선전」이 생겨 양화 활동이 왕성해 갔다. 그러나 본격적인 미술 활동은 1930년대에 들어가서부터 였다.
3·1 운동 이후의 우리의 미술 활동이 선전을 중심으로 해서 유지되어 왔다는데 대해서는 몇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선전은 일제의 정책적 배려에서 생겨진 무대이기 때문에 그 공과에 대한 평가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그 정책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는 그것을 예술적으로 이용한 우리 자체의 미술적 성장을 그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창작적 의욕을 전혀 달성할 수 없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는 말은「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말이다. 비단 미술가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예술가들은, 그리고 문화인들은 일제적 현실 속에서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적 문화적 욕망이나 이념을 달성해 온 것이 아닌가.

<새 악기도 널리 보급>
②음악 분야를 살펴보면 3·1 운동 이전엔 군악대와 교회 음악 그리고 학교 음악이 새로운 기식을 가지고 약간 시도되었을 뿐이었으나 3·1 운동 이후 김인식 홍난파 등에 의하여 새음악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처음으로 시도되고 윤심덕 김영환 김원복 정훈모 등 제씨에 의하여 새로운 기악과 성악이 일반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형식의 음악 활동은 미술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들어서서 그 기초가 짜여졌다.
이 무렵의 우리의 음악 예술은 주로 성악과 기악에의 새로운 시험이 있었을 뿐 작곡면에서는 거의가 편곡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음악에 있어서 창조적인 역량의 본령이 작곡에 있다고 볼 때 작곡면의 후진은 오랫동안 우리음악을 부진상태에 빠뜨린 중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작곡면의 이러한 편곡행위는 음악보다는 그래도 창적적 음욕을 보다 많이 달성했다고 생각되고 있는 다른 예술들이 서양 예술의 아류나 모방에 치우치고 있었다는 사정의 상징적인 표상으로도 보여지는 것이었다. 3·1 운동 이후 우리의 예술이 선전사회의 아류적 모방 색채가 농후했던 것은 그 당시의 예술 활동이 창작 활동의 면보다는 근대 예술 운동의 의욕이 더 강했던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큰 제약받았던 영화>
③연극·영화 분야를 보면 3·1 운동 이전엔 신극이 1∼2회 시도된 일이 있었을 뿐 새로운 연극 활동은 없었고, 3·1 운동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신파가 있었을 뿐이다.
1924년을 전후해서부터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가 발족하면서부터 신극의 활동이 시작된 셈이다.
영화는 3·1 운동 이전에는 없었고 1921년 윤백남의「월하의 맹서」가 최초의 제작 영화가 되지만 이것은 총독부의 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자주적인 활동은 1925년 전후에 나타난 나운규의「아리랑」에서부터 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영화는 처음부터 일제의 기획에서 출발되고, 항상 검열이라는 과도한 제약을 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대중 예술로서 갖는 영화의 직접적인 발향력에 일제가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영화에 가해진 그 통제 정책은 연극이나 문학에 가해진 일제의 간섭과 제약을 상징적으로 대표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검열 제도는 영화만이 아니고 연극 아니 문학에도 실시된 것인데 사전 검열은 물론, 검열에 통과된 것까지도 사후에 부당한 조처를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였다.
이 때문에 영화는 물론 문학이나 연극은 그 표현 방식이나 주제 설정에 특별한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제에의 불만이나 항거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문학이나 편극, 그리고 영화 작품은 그것을 비애와 절망과 같은 일반적인 정감의 성질로 나타낼 수밖에는 없었으며, 상징적인 수법을 감히 시용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같은 것은 그러한 대표적인 일례로도 볼 수 있었다.

<한국적·동양적 사상>
이렇게 볼 때 문학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는 문학보다 훨씬 그 근대적 성장이 뒤떨어졌음을 볼 수 있고, 그나마도 문학의 주도적인 경향 아래 그 근대적 발전이 이루어 졌음을 특히 미술과 연극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양화가「청춘」지의 표지로서 그려졌다는 것은「청춘」지가 문학 쪽에 비중이 더 많은 점에서 알 수 있고, 최초의 신극 운동이 신소설 작가인 이인직에 의해 신소설의 극화에서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3·1 운동 이전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3·1 운동이 문학 이외의 각종 예술 활동에 새로운 자극을 준 것은 명백하다 할 것이다.
넷째는 3·1 운동 이전에는 자주독립과 근대화 이외의 사상적·철학적 활동은 거의 없었다. 사상과 철학에 관한 관심과 추구가 나타나가 시작한 것은 3·1 운동 이후다. 조선 주의를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최남선씨이지만 그 뒤를 이어 많은 사상가와 철학가들이 이 조류를 형성해 갔다.
3·1 운동 이후에 등장한 사상가나 철학가로서 우선 생각나는 사람들은 안호상 김두헌 김동화 현상충 박종홍 제씨는 모두가 서양 철학을 전공한 분들이다. 서양 철학을 전공한 이 분들이 주로 개척한 분야는 오히려 한국의 고유 철학이거나, 고유 사상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불교 연구의 김동화씨나 유교 연구의 현상충씨처럼 한국적·동양적인 사상이나 철학을 추구해 갔다. 이것은 3·1 운동이 사상이나 철학에 미친 큰 영향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근대성의 확립 터전>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3·1 운동이 끼친 문화적 영향은 실로 막중한 것이 된다. 그 막중한 영향을 요약하면,
①근대적인「저널리즘」의 형성
②근대적인 문학의 비약적 발전
③각종 예술의 근대적 자극
④근대적 시민 의식의 형성
⑤한국 사상의 추구를 통한 한국적 자각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문화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그러한 모든 문화적 전개는 주로 근대성의 확립이라는데 있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해서 전개된 이러한 문화적 전개가 근대성의 확립이라는데 있었다는 것은 3·1 운동의 자주독립이라는 족적 정신과 근대화라는 역사적 정신이 두 개의 목표가 아니라 일원적인 하나의 목표였다는데 있다. 어떠한 정신이나 운동이건 족적인 것만으로써는 의미가 없다.
어떠한 민족정신이건 그것은 역사의식과 결부되었을 때 생명을 갖는다. 3·1 운동의 민족정신을 역사의식과 결부시킨 것이 바로 3·1 운동 이후의 문화 운동이다. 3·1 운동 이후의 문화 운동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3·1 운동의 정신은 그 문화적 측면이 주는 의미를 떠나서는 평가될 수 없다. 이것이 3·1 운동에 대한 재평가·재해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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