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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김치 덕에 현란해진 한국인 젓가락질 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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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언젠가 북유럽에서 일식당에 들른 적이 있다. 초밥을 팔고 있었는데 일본 본토인처럼 생긴 내가 들어서자 수많은 현지 손님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본토인은 어떻게 초밥을 먹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오냐, 제대로 보여줄게 하는 생각에 멋지게 젓가락질을 할 궁리를 했다. 알다시피 서구에선 젓가락을 잘 쓰는 것이 높은 사회적 신분의 한 징표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이나 인터넷에 젓가락질하는 법이 상세히 나온다. 우리가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을 배우듯이 말이다.

연어알 김말이 초밥이 나왔다. 연어알을 밥 위에 얹고 김으로 둘레를 싼 초밥이다. 나는 그걸 한입에 넣지 않고 연어알을 하나씩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주변 손님들이 유심히 주목하는 걸 의식하면서 최대한 우아하게 젓가락질을 했다. 녹두만 한 연어알을 하나씩 입으로 옮길 때마다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양인이 아무리 젓가락질을 잘한다고 해도 연어알처럼 미끄럽고 작은 것을 집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젓가락질은 오랜 훈련을 통해 손의 관절과 미세한 근육이 만들어져 완성된다. 어려서 젓가락을 맞부딪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놀리는 훈련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던가. 소설가 윤대녕 선생은 한 글에서 젓가락은 다섯 가지 기능을 한다고 썼다. 집고, 옮기고, 자르고, 찍고, 찢는 기능이다. 서양인이 앞의 네 가지는 얼추 따라 해도 마지막 기능에서는 좌절한다. 예를 들어 파전이나 김치를 찢을 때 쓰는 방법이다. 젓가락을 안으로 모으고 바깥으로 벌려서 찢어야 한다. 어려서 이걸 잘하는 아이들은 어른처럼 대우받았다. 또래 중에서 가정교육을 엄하게 받고 자란 아이가 주로 그런 기능을 빨리 숙달했다. 밥상머리 교육의 엄함을 지금 시대에 어찌 비할 수 있으랴.

숙달된 어른도 간혹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점점 찢는 기능을 쓸 일이 없어지는 듯하다. 손의 근육은 주로 구부려서 ‘잡는’ 데 익숙하게 발달해 있다. 그래서 안에서 바깥으로 벌리는 동작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동작을 누대로 전수하면서 한국인의 젓가락질 특성을 고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웃 일본이나 중국만 해도 ‘찢는’ 젓가락질을 쓸 음식이 별로 없어 보인다. 김치가 그 기능을 쓸 수 있는 가장 큰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아이들이 이 기능을 전수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젓가락질이 서투른 것이다. 그렇다고 포크와 나이프를 잘 다루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통닭집에 가면 나이프 없이 포크 한 벌을 준다. 세상에 유례가 없는 창의적인(?) 기물 사용법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국제사회에서 써먹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학력은 대단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포크와 나이프를 잘 다루고 젓가락을 멋지게 쓰는 것도 세상을 잘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외국인을 만나서 미적분 실력을 겨루기도 하겠지만,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친교할 일이 더 많지 않겠는가.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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