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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시조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디서 싱싱한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솔뫼를 넘는 바람소리다. 정자도 빈채, 사랑채 마루도 빈채. 일그러진방문안에서『드렁드렁….』누구의잠이 깊다. 그문위엔「수우재」라-. 그러고는아무인기척이없다.
전주에서 논산행「버스」를타고 먼짓길 1시간20분을달리면「새실매기」라고 외친다. 아슬히 서편에 보이는 솔뫼와 뽀얀 대(죽)숲 논두렁을 10분걸어 그리로가면 바로 가람이병기옹이 머무르는 연당이 다가온다.
전남익산군원소리진사동의 13대를이어온 이고가는 기둥 돌하나 비뚤지않다. 사당엔 회갑이지난 동백한그루가 노익장하다. 백련은 잎사귀가 더러 시들고있었다.
그얼마만에야 방문이 열리더니 고운손이 먼저 나온다. 걸음을 겨우 가누는 노인-.「가람」이었다. 갑사저고리에, 조끼에, 연분홍바지에…. 이옹은 무턱 낯선 방문객을 반기며 손을 어루만진다. 싸늘한 손이 곱디곱다. 그저 반갑기만 한가보다.『아하, 아하…』가람은 그 이상의 말을 할 줄 몰랐다.<<1965년10월 중앙일보인터뷰「망각속에서」>
가람 이병기옹이 우리시단에 등단한것은 반세기를 훨씬 넘는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서구에 심취해 있을무렵 그는 단소소리와도 같은 한국적「리리시즘」을 읊으며 시조의 중흥을 꾀한것이다. 정하고 조촐하고 향기높은 그의 시조를 한데묶은「가람시조집」은 그로부터 30년만에 나왔다. 그의 시조는 현대 시조의 지보를 굳혔음에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했고 또 벗어난 일도 없다.
그래서 그의 정도자로서의 자세는 오늘날 시조문학의발전에더없는길잡이가됐다. 거목과도같이 그가 국문학계에 군림하던 시절, 8천권의 진본·희서가 그득하던「진수당」엔 무쇠자물쇠가「공허」를 지키고. 63년6월 가람은 4천2백5권의 귀중본을 서울대에 기증했었다.
그리고는 회한도없이 하향. 영탄도 회고도 아닌 망각의 초토를 서성대며 그는 마지막 여생을 보낸것이다. 깡통제 석유등잔과 포대기한장, 그리고「비닐」베개가전부인그의서재에서….『깨운적이 없이 자다 일어 앉았다가 다시 누우면 잠도 그저 아니오고 싸늘한 실바람만이 위로 휘돈다.』(가람작「그방」)
백묵
몸을 담아 두니
마음은 들과 같다
봄이 오고감도 아랑곳 없을러니
바람에 날려든 꽃이
뜰 위 가득하구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구나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손에 백묵을 들고
가슴 아파 하여라.
풍난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같은 뿌리를 서려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꽂은 하얗고도 여린 자연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이며 그 향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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