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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세 16억 이상" … 스타에 올인하는 출판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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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역시 하루키였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64)의 신작 장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제)의 선인세가 국내 최고액인 16억원을 넘은 것으로 알려지며 다시 고액의 선인세 논란이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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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판권을 확보한 민음사는 “하루키와의 계약에 따라 판권 금액 등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1억5000만엔(16억6000여만원)의 선인세를 제시하고도 탈락한 출판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며 선인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선인세(先印稅)는 팔릴 책의 인세를 저자에게 미리 지급하는 돈이다. 책을 찍기 전 판매부수를 예상해 저자에게 “이 정도는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영화로 말하면 개런티에 해당된다. 이후 발생하는 인세는 러닝개런티인 셈이다.

 ‘스타 작가의 몸값’인 선인세 논란이 불거진 것은 1993년 알란 폴섬의 『모레』부터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20만 달러를 선인세로 지급하며 화제가 됐다. 이후 출판 시장이 커지고 ‘유명 작가=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며 선인세는 고공행진을 했다.

 하루키가 대표적인 예다. 90년대 중반 『태엽 감는 새』의 선인세는 1만5000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2년 『해변의 카프카』의 선인세는 전작의 20배로 오른 3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동네는 2009년 『1Q84』의 판권을 8000만엔대(약 10억원)에 샀다.

 외국 작가의 ‘선인세 인플레이션’은 우리 출판계의 한 특징이다. 2009년 댄 브라운의 『로스트 심벌』이 선인세 100만 달러(11억여원)의 시대를 열었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지난해 출간한 성인소설 『캐주얼 베이컨시』도 10억원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작가의 경우는 해외 작가에 훨씬 못 미친다. 신경숙·공지영·김훈·황석영 등 이른바 ‘빅4’의 선인세는 1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가는 3000만~5000만원 정도다. 한 문학 출판사 관계자는 “작품을 낼 때까지 오래 기다리는 경우도 많아 국내 작가의 선인세는 오히려 계약금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출판사 입장에서 거액의 선인세는 모험이다. 선인세만큼 책이 팔리지 않으면 고스란히 출판사의 부담이 된다. 하루키 신작의 선인세가 알려진 대로 16억원대라면 100만부는 팔아야 선인세를 댈 수 있다. 10억이 넘는 선인세를 지급한 댄 브라운의 『로스트 심벌』과 조앤 롤링의 『캐주얼 베이컨시』를 출간한 문학수첩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판사가 고액의 선인세를 감수하는 건 그렇게 해서 재미를 본 사례가 적지 않아서다. 10억원의 선인세를 준 『1Q84』는 200만부 가까이 팔리며 남는 장사를 했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샤이먼&슈스터는 2003년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을 내며 800만 달러(89억여원)의 선인세를 지급했지만 출간 일주일 만에 초판 60%를 팔며 선인세를 모두 회수했다.

 결국 화제작의 판권 경쟁은 돈 놓고 돈 먹는 ‘쩐의 전쟁’이다. 중견 출판사의 편집장은 “빅 타이틀을 잡고 싶어도 선인세를 현금으로 지급할 수 있는 출판사는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게임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선인세를 높이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에이전시의 수주 경쟁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진행되는 비공개 방식이 선인세 상승을 부추긴다. 해외 작가가 국내 출판사의 인세 보고를 믿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치솟는 선인세는 출판계의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고, 특정 작가로의 쏠림 현상으로 인해 출판 시장이 왜곡될 우려도 나온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 시장은 다품종 소량 생산에 따른 다양성이 무기다. 하지만 ‘킬러 콘텐트’만 있으면 돈이 된다는 생각에 비싼 선인세라도 지급하려다 보니 시장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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