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장 22세의 못 다 이룬 꿈을 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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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호 23면

아주 화려한 레이블이다. 선홍색의 머리글자와 화려한 건물. 자세히 보면 지붕은 교황청의 로고인 교황의 모자다. 그 아래로 천국과 교황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두 개의 열쇠가 보인다. 고딕 양식의 건물은 아직도 존재하는 아비뇽 유수시대의 교황청 입구 모양이다. 그리고 한가운데 붉은 바탕에 적힌 ‘ioannes pp xxii’는 바로 교황 장 22세의 라틴어 표기다. 그렇다면 이 레이블은 가톨릭의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15> 클로 데 파프(Clos des Papes)

레이블 붉은 띠 위에 적힌 1316년은 보르도 남쪽 카오 지역에서 1244년 태어난 자크 두에즈(Jacques Dueze)가 장 22세(Jean XXII)의 이름으로 교황이 된 해다. 72세에 교황이 되었지만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프랑스 남부지역 아비뇽에 교황청을 세운 뒤 최초로 교황이 된 역사적인 인물이다. 특히 ‘샤토네프 듀 파프’라는 와인의 역사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재임 기간 중 이웃 마을인 샤토네프 듀 파프에 여름 동안 머무를 수 있는 교황 별장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건물 주변에는 포도나무를 심도록 했다. 그러나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직위 18년 만인 90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이 레이블은 샤토네프 듀 파프 와인의 역사를 잘 대변해 주고 있으며 이 마을 원산지 통제(AOC)의 근간을 설명해 주는 레이블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교황 장 22세가 새 건물을 지으라고 하지 않았고, 포도나무를 심지 않았다면 지금의 AOC 샤토네프 듀 파프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레이블은 헌정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 레이블 와인의 주인공은 샤토네프 듀 파프 지역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 온 와이너리로 오너는 폴 아브릴(Paul Avril, 1873~1962). 그는 샤토네프 듀 파프 AOC를 발족시키는 데 뒤에서 힘쓴 중요 인물 중 한 명이다. 폴의 와인은 ‘클로 데 파프(Clos des Papes)’라는 이름으로 1896년부터 시판됐다. 클로는 포도밭의 경계를 이루는 말로, 현재 마을 여러 곳에 포도밭이 흩어져 있고 그중 하나는 허물어진 교황의 별장 주변에 돌담(Clos)으로 경계를 이루며 남아 있다. 교황의 포도밭인 ‘클로 데 파프’란 말의 기원이 되는 포도밭이다.

폴의 아들 레지 아브릴(Régis Avril, 1901~1987)은 이 와인을 조지 퐁피두와 드골 대통령에게도 납품했다. 현재는 4세인 폴 뱅상 아브릴이 2009년 별세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와이너리를 꾸려가고 있다.

와인은 단지 두 종류, 화이트와 레드를 만드는데 10% 정도가 화이트고 나머지는 레드다. 레드의 품종은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품종인 그레나슈(65%), 무베드르(20%), 그리고 시라(10%)와 다른 종류(5%)를 섞어 만든다.

필자는 파리 여행 중 우연히 레스토랑 오너의 선물로 89년산 이 와인을 마셔본 적이 있다. 엷은 벽돌색으로 변한 10년 이상 된 와인이었지만 살아 있는 산미가 아주 매혹적이었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보디 감과 균형이 실한 음식을 먹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 와인은 그 지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한 장의 와인 레이블 속에는 거대한 인류 역사의 한 단면이 선명하게 남아 다시 새로운 와인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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