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IMF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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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흔히 출가(出家)를 '머리를 깎는다'라고 한다. '집을 나선다'라는 말 자체가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불교적 비유라면, 삭발(削髮)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행위인 까닭이다.

절집에서는 특별히 머리칼을 '무명초(無明草)'라 부른다. '무명'은 '빛이 없음'이란 뜻이지만, 불교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란 의미로 쓰인다.

그 어리석음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쌍한 인간이란 존재다. 곧 무명은 불교적인 인생관과 존재론의 출발점이자 방대한 불교철학의 첫 단추인 셈이다.

그래서 삭발은 그 무명을 떨쳐내는 것, 곧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는 상징이 된다.

물론 머리 깎는다고 출가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중은 논두렁을 베고 죽을 각오를 해야한다"는 옛 스님들의 말처럼 '목숨을 걸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진정한 출가라 할 것이다. 곧 초발심(初發心:처음 시작하는 마음)이다.

절집에서는 '출가할 때의 그 굳은 마음이면 바로 그 자리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초발심은 비장하고 숭고하다.

최근 초발심한 늦깎이 출가 희망자들로 조계종 행자교육원이 만원이라고 한다. 지원자의 42%가 불혹(不惑)을 넘어섰다니 기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이 내년부터 40세 이상 출가 희망자를 받아주지 않기로 했기에 올해 한꺼번에 몰렸다.

조계종이 늦깎이 출가를 금지한 것은 IMF 출가자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삶이 고단해진 중년들이 일종의 도피처로 절집을 찾는데, 진정한 초발심 없이 머리만 깎는 바람에 수행 풍토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다.

그렇더라도 깨달음의 길을 간다는 사람들이 구도의 의지를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흔히 불교에서 부처의 제자를 가리키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란 말엔 출가.재가(在家)의 구분이 없다.

출가한 사람은 비구(남).비구니(여), 출가하지 않은 재가 불자는 우바새(남).우바이(여)라고 따로 부르지만 불법(佛法) 앞에선 모두 하나인 까닭이다.

진정한 출가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느냐의 여부, 구체적으로 계(戒)를 지키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할 것이다. 무명초를 깎는 것은 마음 속의 무명을 떨치기 위한 것이니까. "나는 매일 출가한다"던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새롭다.

오병상 국제부 차장 <obs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