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다 입고 혼자 남아있는 딸 보면 죄인된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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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엄마가 출근하면서 시어머니에게 아이 둘을 인계한다. 시어머니가 오전 8시30분에 작은아이(4)를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오전 9시에 큰아이(6)를 유치원에 보낸다. 시어머니가 오후 4시 아이 둘을 데려와 오후 5시 미술학원에 보낸다. 오후 6시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찾아와 저녁을 먹인다. 오후 7시 엄마가 시댁으로 가 아이들을 데려온다.

 공공기관 직원 이영미(37·여·서울 서대문구)씨와 아이 둘의 하루 일정이다. 시어머니가 없으면 이씨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린이집이 일찍 애를 받아주지 않고, 늦게까지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과 오후는 시어머니에게 신세를 진다. 시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아이 둘이 귀가한 후에는 미술학원에서 1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시어머니께 미안해서 야근할 때는 친정어머니의 신세를 진다. 시어머니께 수고비 조로 월 70만원, 두 아이의 학원비로 30만원이 든다. 매월 1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돈도 돈이지만 이씨도, 시어머니도, 아이들도 모두 힘들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맘 편히 직장생활을 한다는 건 직장맘의 지나친 욕심일까. 부모의 퇴근 시간보다 빠른 아이의 귀가 시간에 맞추기 위해 가정마다 갖가지 고육책을 짜내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속 시원한 해법이 못 된다.

 이씨가 고단한 이유는 어린이집의 조기 귀가 압박 때문이다. 올 2월 어린이집 입소 상담 자리에서 원장은 “늦어도 오후 4시30분까지는 아이를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원장은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남아있으면 아이 정서에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아이에게 안 좋다”는 말을 듣고 어느 부모가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기 귀가 이후는 친정부모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2년 보건복지부의 보육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유아 3343명 중 맞벌이 가정 아이는 1056명이었다. 이 중 절반 정도인 517명(49%)이 조부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조부모 옆으로 이사를 하거나 조부모가 이사를 오기도 한다. 서울 도심에 직장이 있는 이미나(38·여)씨는 최근 인천의 친정 옆으로 이사를 했다. 이씨는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려 불편하지만 친정 도움이 없으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이 오후 7시30분까지 애를 봐주더라도 부모의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전업주부의 아이가 오후 2~3시에, 맞벌이 가정의 애들이 오후 4∼5시에 귀가하고 나면 두세 명 정도만 남는다. 본지가 직장맘 30명, 보육교사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민간 어린이집 중 오후 3시 이후에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갖춘 곳은 거의 없었다.

 경기도 고양시의 민간 어린이집 교사 신정숙(가명·44·여)씨는 “오후 4시 이후엔 두세 명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비디오를 보여주거나 혼자 놀린다”고 말했다. 신씨는 또 “솔직히 늦게까지 남아있는 아이들이 안쓰럽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그 시간에 보육일지나 안전위생점검표 작성 등 업무 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직장맘은 퇴근 때만 되면 마음이 바쁘다. 매일 ‘칼 퇴근’해서 허겁지겁 달려간다. 직장맘 정문숙(33·서울 강동구)씨는 “장난감은 다 치우고 옷 다 입고 혼자 남아있는 19개월 딸을 보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조금이라도 늦으면 어린이집 측에 죄인이 된 듯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이지영·고성표·장주영·강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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