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는 이미 결정, 적어도 반대만은 말아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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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세종시의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은 요즘 산하 대형 공기업인 A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A사의 B사장이 곧 물러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직원들이 사실상 일손을 놔버렸기 때문이다. B사장의 임기는 아직 한참 남았다. 그는 아직까지 임기 만료 전에 물러날 뜻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A사 직원이나 국토부 공무원 가운데 B사장이 정해진 임기를 채울 것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 정부의 ‘공공기관장 물갈이’ 차원에서 B사장도 조만간 사표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답답한 건 이 회사와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공무원들이다. 겉으로는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본부장급 간부들조차 나중에 혹시라도 문제가 될 것 같은 사안에 대해선 결재를 미루고 시간만 끌고 있다”며 “사장이 물러난 뒤 있을지 모를 감사원 감사나 소송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꼬투리를 안 잡히려고 애쓰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사정은 다른 부처 산하 공공기관도 대체로 비슷하다. 지난 1월 말 정부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열고 295곳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했다. 지난해에 비해 7개가 늘어난 것이다. 이른바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공공기관에서 정부가 사실상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기관장·감사·임원을 합쳐 2000여 개에 달한다. 이 중에는 한국전력·토지주택공사·도로공사·가스공사 등 재벌 총수급 기관장 자리도 포함돼 있다. 한국전력은 자산 규모 176조원(계열사 포함), 토지주택공사는 168조원으로 재계 서열 2, 3위인 현대자동차그룹(166조원)이나 SK그룹(140조원)보다도 덩치가 크다.

 법적으로는 민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공개모집을 통해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되는 인물을 기관장에 추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2007년 만들어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다. 대형 공공기관의 기관장에 빈자리가 생기면 임원추천위원회에서 복수의 후보를 소관 부처 장관에게 추천하고, 장관이 이 중 한 명을 골라 대통령에게 제청하도록 규정돼 있다. 총수입액 1000억원 미만의 공공기관은 임원추천위원회를 거쳐 소관 부처의 장관이 임명한다.

 현재 토지주택공사·가스공사·인천국제공항공사·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한국환경공단 등 10개 기관이 기관장 공모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일부 기관에선 서류 접수가 끝나기도 전부터 지난해 새누리당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정치인이나 교수, 전직 고위 관료의 이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임원추천위원회는 요식 행위에 그치고 청와대가 ‘국정철학’을 내세워 공공기관 인사를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이종수(행정학) 연세대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공공기관장을 추천하는 위원으로 두 차례 참여한 뒤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사전 각본에 의해 짜여진 ‘낙하산 인사’를 추인하는 데 들러리를 섰다는 불쾌감 때문이다.

 이 교수는 “회의 전날 주무 부처의 차관이 전화를 걸어와 ‘대세는 이미 결정됐으니 적어도 반대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전했다”며 “다음 날 회의에 참석해 보니 위원 과반수가 인사권자의 의중을 대변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나 혼자 이의를 제기한다고 바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은 공공인사감독관실(OCPA)이란 독립적인 기구를 통해 정파를 뛰어넘어 공공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물을 뽑고 있다”며 “국정철학을 내세워 권력에 의한 낙점을 정당화하지 말고 공공성을 인사의 첫째 기준으로 하는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김창규·주정완·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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