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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오늘의 초점」드골 프랑스|배수에 진친「골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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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드골」대통령은 국회해산과 새로운 총선거라는 포석으로 좌익학생과 노동자들도 전에정면으로 맞섰다. 하야실이 마다하던「드골」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온 배후에는 다분히 60만군대의 그에 대한 충성심이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총선이 순조롭게개최될수 있느냐에 있다. 「프랑스」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명감-「드골」은 아직도 버티고 있다. 그의 생애에 일찍이 없었던 혼란과 역류속에서 도자기의 신념을 관철하려는데「드골」의 위대함과 한계, 그리고 형욕이 뒤따른다. 대외적으로는 「영광된 프랑스」의 상을 부각시켰지만, 대내적으로는 경제의 심체로 오늘의 혼란을 가져온 이율배반적인 「드골」의 10년 집권을 분석해본다.
『「프랑스」의 이름으로 그들(반란군)을 제지하기위해 어떠한 수단이라도 쓸 것을 나는 명한다.… 우리조국을 위협하는 부행앞에서 우리 헌법 제16조를 발동시키기로 결심했다.…「프랑스」여성들이여, 「프랑스」남성들이여, 나를 도와주시오.』
1961년4월23일 「드골」이 「프랑스」국민에게 보낸「메시지」의 일부다.
1958년10월4일 제5공화국 헌법과 더불어 출항한「드골」정부의 대외정책은 3단계로 분류 해 보면 편리할 것이다.
그것은 첫째 제4공화국의 붕괴원인의 하나였던「알제리」문제의 해결, 둘째 「프랑스」경제 발전을 위한 「유럽」협력체제의 실현, 셋째 제3세력으로서의 「프랑스」의 지위확보 단계라 볼수있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59년 대통령이 된 「드골」은 그해 9월16일 「알제리」국민에게 「자결권」을 주었다. 1961년4월23일 「드골」은 「알제리」 반란정권을 규탄하고 그해7월에는 소위 GPRA와 새로운 협상을 시도했으며 11월23일「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군 장교들에게 「알제리」문제해결의 필요성을 역설, 군대의 행동범위를 규정하기도 했다. 마침내 1962년3월18일 「에비앙」회담이 합의점에 도달, 7월3일 「알제리」의 독립이 선포됨으로써 제4공화국의 쓰라린 상처를 씻고 「프랑스」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3년은 「드골」의 대외정책 노선이 부각되는 해였다. 「바하마」에서 채결된 미·영간 의원자력다각조약에 가입할 것을 거절하고 그해 6월 가입 「드골」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수권에서 「프랑스」함대를 탈퇴시켰다. 뿐만아니라 그해 7월27일에는 이틀전에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미·영·소 핵실험제한 조약에 가입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1964년1월31일「드골」은 중공을 승인, 대사급 사절을 교환키로 결정했다.
이와같은 중공과의 수교는 「드골」의 제3세력 구축을 위한노력의 구체적표현으로 풀이되었다.
그의 제3세력 구축노력은 마침내 NATO본부를 「마리」에서 「브뤼셀」로 옮기는 사태까지 빚었다.
요컨대 10년 집권기간중 「드골」의 외교노선은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표현 이 풍기는바와 같이 2차 대전후 미·소의등장으로 약화된 제2위 적 국가로 떨어진「프랑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또는「프랑스」인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3세력의 「유럽」 권력을 만들어 미·소를 견제하고 교량적 역할을 하려는 새로운 실력을 구축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1958년부터 68년까지 그의 외교정책수행을 보면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다. 그의 비합리성은 외교목표에 달성키 위한 지출액의 크기로 우선알수 있고「프랑스」의 위신 또는 영광 따위의 비현대주의적 사고는 「유럽」공동시장과 같은 비교적 현실주의 적인 구상과 모순된 내용을 형성하였다. 「드골」은 또 후진국원조에도 실력이상으로 힘썼다.
1964년에 후진국에 대한 「프랑스」의 원조액은 13억6천3백만불에 달했고 1965년엔 12억9천8백만불이라는 거액에 달했다.
이에비해 영국과 서독은 각각 약7억불에 머무르고 있었다. 「드골」은 분명히「프랑스」 정치질서를 한동안 확립시켰고 「프랑스」의 부를 증대시킨것도 사실이다. 그의 경제사회정책과 경제협력정책은 현보주의적이며 실용주의 이기도하였다. 그러나 「드골」장군의 국제정치학은 20세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19세기의 풍류를 더 지니고 있는 듯하다.
특히 그의 연설들을 들어보면, 그가 쓰고 있는 언어는(필자가 직접「라디오」나 TV를 통해 듣고 글을 통해 읽은바로는) 현대「프랑스」인들의 시대감각과는 약간거리가 있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는 그의 내각의 일원인 「말로」(우화상인동시에작가)보다도 오히려 「빅토르·위고」(19세기프랑스시인)가 더잘 묘사할수 있는 형의 인물인 것 같다.
「드골」장군은 1940년대의「프랑스」인에게는 잊을수 없는 은인이었다. 그는 진실로 「프랑스」, 그의 조국을 사랑했고 모든 「프랑스」인은 그의 애국심을 함께 호흡할수있었다.
1944년 「드골」장군의 개선행진은, 바로 1958년「프랑스」의 정치위기때, 온국민이 그에게 부여한 신임의 열쇠이기도 했다.
그의 집권 10년간의 행적을 돌이켜 보면 수많은 공과가 있다. 그의 대외정책은 그런대로 다른분야, 즉「프랑스」의 경제사회정책과 비교해 볼 때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고있는 문제점은 아닌 것 같다.
「프랑스」의 국제발언권향상을 위한 핵무기개발 또는 후진국원조등에 과분한 예산을 투입한것에 대해서는 국민의 비판이 없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박한 문젯점은 바로 그의19세기적 사고방식과 20세기 후반기의 「프랑스」 국민의 사고방식의 차인 것 같다. 비교적 말썽의 초점을 벗어난 「드골」의 말썽의 초점을 벗어난 「드골」의 외교정책의 기본정신인 「프랑스의 영광」「위대한조국건설」에 공감하고 흠뻑젖어서 1940년대에 느꼈던 감격의 도가니속에서「드골」을 받드는 「프랑스」인은 과연 몇명이나 될것인가.
『「프랑스」여성들이여, 「프랑스」남성들이여,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그는 다시금 그의 국민들에게 외칠수 있는 심정일까?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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