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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댓글의 심리학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4호 18면

공중화장실이나 마을 어귀의 담벼락을 어지럽혔던 낙서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시민의식이 성숙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터넷 댓글 공간이 시끄러운 것과 혹시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근거나 품위가 있건 없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일단 글로 배설해 버리니 굳이 옹색하게 더러운 벽 따위를 이용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다만 공중화장실의 낙서는 확실하게 “나는 저질이요”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인터넷 공간은 컴퓨터라는 기계와 그럴듯한 인터넷 매체라는 공간이 만드는 특별함 때문에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잠깐이나마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실제로 어느 틈에 댓글 문화에 거꾸로 전염되고 눈들이 무뎌졌는지 주류 매스컴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옛날 같으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잘도 주고받는다. 문화는 생활이나 지식 수준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라는 견해가 꼭 맞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뉴욕 슬럼가의 길거리 낙서인 그라피티나 산업디자인과 만화 등 대중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팝아트, 재즈나 랩이 극진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언젠가는 낙서나 댓글이 한 단계 진화하고 풍성해질 가능성이 그렇다면 과연 있을까.

일러스트 강일구

 사실 예술적 가치를 떠나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쓰고 말하면서 자기표현을 하는 본능이 있다. 아이들이 숟가락만 잡을 수 있어도 손에 연필이나 크레용을 주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건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글 혹은 그림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삶은 인간적이지 않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숲 속에서라도 외쳐야 병이 낫는다. 말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돼 슬픈 결말로 끝나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크로마뇽인이 그린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물에 잠겨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까닭은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려는 인간의 원형적 본능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유례가 없는 기계를 매개로 한 대중적 참여가 가능한 인터넷상의 댓글이 문화적 자원이나 유산 중 하나로 인정받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자기검열과 절제가 전제돼야 한다. 자신의 얼굴이나 신상이 아무래도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유튜브상의 자기표현이 댓글에 비해 그나마 질이 좀 나은 것 같다. 지금처럼 실명을 내걸지 않는 댓글이 자정기능을 통해 개선되리란 기대는 너무 순진해 보인다. 우리 심성에는 선악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얼굴이 뜨뜻해지는 부끄러움의 감정, 즉 체면의 손상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댓글과 낙서가 쓴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욕설과 근거 없는 소문과 낯 뜨거운 표현만 가득한 이유다. 해서 화장실 낙서가 사라진 것처럼 무기명 댓글이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고립된 채 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는 부적응자들이 광인처럼 자신들의 분노를 인터넷상에서라도 배설해야 ‘묻지마 살인’이나 ‘테러’ 등 끔찍한 범죄가 줄어든다고 애써 순기능을 떠올리며 무시하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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