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배우를 위한 영화 '묻지마 패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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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영화의 흥행 열기에 스타배우들 존재가 힘이 되었음을 부인하긴 힘들다. 국경을 막론하고, 대중영화에 스타급 연기자들의 파워가 흥행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흥미로운 영화가 한편 만들어졌다. '묻지마 패밀리'는 그야말로 배우들을 위한, 배우들의 영화다. 임원희, 정재영, 신하균, 류승범 등 최근 들어 영화와 TV 등에서 자주 얼굴을 볼수 있는 연기자들이 단체로 출연한다. 더 재미있는 건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극에서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 과연 어떤 영화가 나왔길래?

'묻지마 패밀리'는 '킬러들의 수다' 등을 만든 장진의 영화다. 아니, 그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영화라는 표현이 옳겠다. 영화는 세편의 에피소드로 꾸며져있는데 각기 다른 연출자가 만들었다. 박광현, 박상원, 이현종 감독이 그들인데 주로 CF와 뮤직비디오 등에서 작업했던 경력이 있다. 장편영화를 작업하기는 모두 처음이다. '묻지마 패밀리'에서 장진 감독은 각본과 각색, 그리고 프로듀서의 역할을 맡았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의 흔적이 역력하게 묻어나는걸 발견할 수 있다. 기이한 상황극과 대사의 묘미, 그리고 영화를 대중문화의 한 형태로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 장진 감독의 스타일에 배어있는 것이다.

영화의 세 에피소드는 서로 연관성이 많지 않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내 나이키'. 1980년대 초반 무렵, 중학생 명진이는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고 있다. 아버지는 개인택시를 마련하는 게 꿈이고 큰형은 전교 일등을 하는 게 꿈. 명진 역시 소박한 꿈을 하나 갖고 있는데 나이키 운동화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만난 고등학생들에게 돈을 뺏기면서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사방에 적'. 한 숙소에 투숙한 손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코믹한 상황이 펼쳐진다. 사랑하는 여자의 외도를 못참고 그녀를 죽이려는 남자, 막가파식 조직원들, 살인을 일삼는 킬러가 그들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교회 누나'로 여기선 애틋한 로맨스가 싹튼다. 군복무중인 영일은 휴가 마지막 날에 평소 짝사랑하던 교회누나를 만난다. 누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지만 영일은 그녀에게 오랫동안 참았던 사랑고백을 들려준다.

이렇듯 '묻지마 패밀리'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간다. '내 나이키'는 1980년대에 관한 노스탤지어가 짙은 단편인데 'E.T'를 패로디하고 홍콩영화에 관한 향수를 담고 있는 등 복고적인 기운이 역력하다. '사방에 적'은 엽기취향이다. 배설물 유머, 외설적인 불륜에 관한 묘사 등이 재치있는 유머감각으로 포장되어 있다.

'교회누나'는 가장 관심이 쏠릴만한 에피소드다. 약간 진부하게 보일수도 있는 로맨스, 다시 말해서 연상의 여인을 일편단심으로 흠모하는 어느 남자의 이야기인 것. 오랜 시간동안 연모의 정을 간직했던 남자가 여자와 헤어지는 순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비극적으로도 읽힐수 있는 영화의 상황은 갑작스런 반전의 묘미로 위트있는 희극으로 돌변한다(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영화를 볼 분들을 위해 생략합니다!). 짧은 단편이지만 상황극의 재미와 코미디의 본질이라는 것, 즉 눈물과 웃음의 교차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연출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소품이다.

이밖에도 각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연출자들의 개인적 시선이다. 영화문법에 대한 강박관념없이, 이들 연출자들은 자유롭게 영화를 해석하고 그것으로 관객과 대화하려는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다양한 영화들, 즉 국적을 불문하고 자신들이 즐겼던 영화를 인용하고 옮겨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화광'적 태생을 숨기지 않는다. 이 신인 감독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장진 감독은 '묻지마 패밀리'에서 영화감독 뿐 아니라 기획자로서 재능을 과시한다. 잘 알려져있듯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역시 장진 감독과의 특별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최근 만들어진 한국영화 중에서 이렇듯 스타시스템을 능숙하게 활용했던 사례는, 전무했던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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