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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오염된 고국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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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아버지는 야채장사였다. 그는 미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타고난 낙천성과 근면성을 발휘하여 가게를 번창시켰다. 어머니는 한국인이 모여 사는 퀸시를 사랑했다. 청춘을 바쳐 일군 사업에서 돈이 모이더라도 어머니는 결코 이 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뉴욕 태생 아들은 안다. 시민권자인 아들, 헨리 박은 미국 주류사회의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하는 경계인이다. 안간힘을 쓰면 못할 것도 없지만 뭔지 모르게 밀어내는 정체불명의 힘과 애써 겨룰 생각이 없다. 이게 프린스턴대 창작과 교수이자 소설가인 이창래가 ‘영원한 이방인’(원제: 네이티브 스피커)에서 설정한 주인공의 심성이다.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터득한 겹눈의 시선을 한국 교민들의 이민경험에 투사한 이중심리인데, 많은 이민자가 공감을 표시할 것이다.

 미국 200만 교민은 그렇게 살아왔다. 세탁소, 청과물상, 배달원, 잡화상은 눈물 없이 회상할 수 없는 1세대 교민들의 생업이었다. 그것도 다른 인종들이 꺼리는 흑인동네와 라티노 마을에 터잡아 기록했던 하층민 탈출기는 억척스러운 한국인들만이 해낼 수 있었던 성취 무용담일 거다. 인종구분으로 쳐진 단단한 계급장벽을 누가 뚫을 엄두라도 낼 수 있으랴만, 한 층씩 올라설 때마다 단단히 다진 인류학적 애환과 사회학적 고뇌를 밑천으로 이제 어엿한 중산층 반열에 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창래가 묘사한 저 이방인적 시선을 떨쳐낼 수 없다. 1세대 교민들이 바라는 최대의 소망은 이거다. ‘자식들아, 너희들만은 주류여야 한다!’

 자식세대를 주류사회로 밀어 넣고자 안간힘을 쓴 1세대 교민들이 자신을 의탁한 것은 ‘고국환상’이다. 비행기가 허름한 김포공항을 이륙했을 때 마음속에 꼭꼭 챙긴 장면들, 가령 고향집, 얼룩빼기 황소, 초로의 부모, 건설공사로 부산한 대도시, 골목길 술집과 다방, 친구 얼굴들이 물감처럼 번지는 풍경화는 서럽고 낯선 곳에서의 고투를 이겨내는 충전기였을 것이다. 이 고국환상은 첫사랑과 같아서 힘들고 외로울 때는 반드시 뇌리에 인화되고 때로는 저절로 진화해 재기의 힘을 북돋웠던 천상의 손길이다.

 담대한 가수 싸이가 미국 상류층까지도 말춤 행렬에 동원하는 그 장면은 교민들의 오랜 고립감을 단번에 해소하는 감격 이상의 것이었으리라. 대통령의 방미는 교민들의 심성에 내재된 경계인 의식을 주인 의식으로 바꿔놓는 중대한 행사다. 방미 스케줄에 ‘동포와의 대화’를 빼놓지 않는 것은 이런 때문이다. 고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그들 앞에 현현함으로써 이방인적 고독과 불안을 달래고 ‘고국환상’이 덧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그들이 직접 뽑은 대통령이 아니던가. 소수인종으로서 겪었던 정치적 소외는 대통령이 실체화한 고국환상을 통해 한꺼번에 해소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1세대 교민들이 쟁취한 부와 지위에 힘입어 중심부로 진입하는 자식에게 고국에서 온 고위층, 그것도 대통령의 입이라는 자가 행한 짓. 그것은 고국환상의 애틋함과 순결함을 오염시킨 야만이었다. 그가 가이드라고 명명한 인턴여성은 단순한 길잡이가 아니었다. 고단한 이민생활을 지켜온 부모세대의 고국환상을 미국 중심부에 활짝 개화시킬 200만 교민들의 꿈나무였던 거다.

 그 야만적 행위가 경범죄인지 중범죄인지는 미국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곧 결판이 나겠지만 실증법적 처벌이 닿지 않는 곳에 더 중대한 범죄가 저질러졌다. 첫사랑과 같은 고국환상을 오염시킨 죄, 이민사에 밴 인류학적 애환을 몰각한 죄, 그리고 교민들이 눈물로 쌓아 올린 대외적 자긍심을 훼손한 죄. 청와대는 바로 이 사건에 내재된 다중적 코드를 읽어내서 미국 교민사회의 상처를 치유할 후속조치들에 더 신경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했다’는 발표 외에 교민사회의 심리정상화를 위한 어떤 방안도 궁구하지 못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이제 그만 봉합하자는 투다. ‘법적 사고’에 매몰된 탓이다. 그러니 대통령의 사과성명도 다친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이다.

 윤창중이 천하의 망나니가 아니라면, 그래도 전직 언론인으로서 천리(天理)를 조금은 알고 예의와 염치를 존중하는 선비의 후예라고 한다면, 어딘가에 숨어서 처벌의 경중과 득실을 따지고 있을 게 아니다. 그건 잡범이나 소인배가 하는 짓이다. 미국 경찰에 스스로 출두해 미국법의 처벌을 달게 받는 게 식자(識者)의 도리다. 더 중요한 것은 워싱턴 광장에 엎드려 교민사회에 석고대죄하는 것은 어떤가. 교민사회가 비난과 고통 속에서 결국 그 죄를 사해준다면 고국환상을 얼룩지게 한 오염은 씻겨질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