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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정권 출범 100일,‘열망’을 지펴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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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늦은 오후 KTX 서부역사 앞,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200여m 줄지어 있다. 기사가 말했다, 30년 기사생활에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고. 잔돈을 받아 든 내 손이 조금 머쓱했다. 서민층의 생활고를 알리는 각종 소식들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아파도 병원 안 가고 약도 거른다, 자영업자의 매출이 3년 만에 최악이다, 50대 가장들이 기초생활자에 속속 편입되고 있다, 성장잠재력은 바닥을 향해 추락 중이다. 이런 우울한 얘기에 주눅 들지 않으려면 괜한 헛기침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환란 이후 15년 동안 출현한 세 번의 정권은 이런 광경을 일소한다고 큰소리쳤다는 점에서 공통이지만, 일소는커녕 오락가락했던 경제위기에 오락가락하다가 퇴진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낭패감을 안겨줬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났던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새벽잠도 설치며 부지런히 뛰어다녔건만 5년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을 겨우 3547달러 올려놓았고, 경제성장률 하락을 2%대에서 저지하는 대역사(大役事)에 성공했다. 노무현 정권 때에도 증가한 소득이 고작 5000달러 정도였으니 보수나 진보나 실력 자랑할 행색은 아니다. 15년 동안 한국경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떤 고질병에 걸렸길래 고물 화차가 고산준령 올라가듯 하는가 말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등극한 것은 보수진영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대가 열렬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진보진영이 그다지 미덥지 않아 돌렸던 발길이었다. 국민은 주눅 든 가슴을 환하게 펴줄 지도자를 원한다. 거듭되는 좌절과 낭패의 고리를 끊고 기대지평을 넓혀줄 지도자를 원한다. 한국경제가 고물차가 돼가는 원인을 정확히 짚어 체질전환을 명령할 그런 리더십이 쉽지는 않겠지만, ‘준비된 여성대통령’에게 거는 국민적 여망은 ‘대전환’ 그것이다. ‘지지부진한 15년’에서 엑소더스를 감행할 리더십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영국의 대처 총리처럼 되고 싶다면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대처 총리는 동맥경화증으로 신음하던 영국을 회생시킨 집도의(執刀醫)였다. 매처럼 날카로웠던 그녀의 눈은 영국의 잠재력을 옭아맨, 정의롭지만 낡은 원리들을 잘라내는 데 집중했다. ‘복지 영국’을 창출했던 찬란한 원리와 어려운 작별을 선언해야 했다. 무소불위 노조에 싸움을 걸어 집단주의 병폐를 제거했으며, 적자 공기업을 팔아 치웠고, 주택민영화를 시도했다. 부작용도 많았다. 기차가 멈춰 섰고, 물가가 뛰었으며, 파업이 산발했지만, 낡은 정의와의 작별을 향한 그녀의 집념은 열매를 맺었다. 마침내 경제가 살아났다. 타성적 진보에 시달리던 영국을 보수주의로 보수(補修)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어떤 국가든 이런 변곡점을 찍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융성의 대초원으로 나갈 수 있다. 한국경제의 고질병은 무엇인가? 재벌독주가 문제인가, 중소기업을 압박하는 갑을관계가 문제인가? 아니면 힘센 노조와 대기업의 야합이 문제인가? 스마트폰과 자동차 외에 한국이 나아갈 차세대 성장동력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평균 IQ 세계 2위, 평균 학력 최고, 10만 명당 박사 최다 보유국가, 그리고 짧은 인생 주기에 세계사적 사건을 치열하게 겪은 고난의 국민이 저 시대적·국가적 과제 하나를 못 풀고 있다. 새 정권에 맡긴 과업이 그거 아닌가?

 정권 출범 100일, 박근혜정부의 행보는 차분하고 신중하긴 했다. 필자만의 평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왠지 ‘관리형 정부’라는 느낌도 든다. 적어도 소모성 사업은 삼갈 것이며, 세금 아껴 쓰고, 국가기강을 바로잡아 나갈 것으로 믿는다. 대북위기에도 단호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차분함 뒤엔 소심함, 신중함 뒤엔 ‘리스크 제로’ 사고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쉽다. 정권의 브랜드인 ‘창조경제’로 돌파구가 뚫릴까, 체질개선이 이뤄질까? 시간제 일자리 늘리는 게 ‘고용창출’의 최선책인가? 맞춤형 복지가 서민 원기를 회복시킬까? 국무회의에서 장관들과 수석들이 받아쓴 수십 개의 리스트를 ‘차분하고 신중하게’ 실행하면 자영업에 돈이 돌고 중소기업 파산행렬이 조금은 줄겠지만 근본구조가 바뀌는 것은 아닐 게다. 성공의 타성에 축 처진 한국에 필요한 건 동력과 순환계의 대수술일진대 ‘꼼꼼 체크 리더십’으론 이행 불가다. 그건 실무진에 넘겨주고, 대신 ‘통 큰 행보’ 좀 볼 수 있을까?

 정권 출범 100일, 국민은 원한다. 고질병을 악화시키는 ‘공공의 적’을 호명하고 치열한 싸움을 걸어주기를. 그리하여 뭐가 문제인지 국민이 알아차릴 수 있기를. 수비형 정치에서 공격형 정치로 전환하기를. 골을 작렬시키지 않는 수비형 축구에 관중은 열망하지 않는다. 주눅 든 가슴에서 사라진 말, 열망(Ambition)! 제발 열망을 지펴주기를.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