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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청와대 참모 간에 '보고 장벽' 허물어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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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정치부장 만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윤창중 스캔들’에 대한 대책으로 인사위원회의 다면·상시 검증 체제 도입 방안 등을 내놓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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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말. 김대중(DJ) 대통령이 러시아·몽골을 방문하는 사이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최순영 대한생명 회장의 부인이 김태정 법무부 장관의 부인에게 수천만원대 옷을 줬다는 의혹이다.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DJ에게 상황을 두 차례 보고했다. 그러나 김태정 장관의 거취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중권 실장 등 청와대 내 여권 신주류는 동교동계 등 구주류가 김 장관 퇴진 운동을 벌이며 신주류를 공격해온 데 불만이 많았다.

6월 1일. DJ는 귀국 기자회견에서 “몽골에서 국내 여론조사기관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았는데 65%가 ‘조사 뒤 법적 하자가 있을 때 처리해야 한다’고 했고, 33%만 ‘도덕성을 문제 삼아 무조건 해임해야 한다’고 했다”며 김 장관 경질을 미뤘다. 또 “마녀사냥식으로 몰고 가면 후환을 남길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은 민심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청와대 부속실장을 지낸 고재방씨는 “청와대 직원들도 연루된 사건인 데다 대통령의 외국 방문 성과도 가려지는 것 같아 청와대가 사건을 조기에 진화하려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통령도 ‘사건이 과장됐다’고 생각하던 차에 강경 조치와 온건 조치를 건의하는 목소리가 같이 올라오자 온건파의 손을 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청와대는 국회 청문회와 특검을 지켜봐야 했다.

#김영삼(YS) 정부 초인 93년 3월. 박희태 법무부 장관의 딸 대학 편법 입학 사건이 불거졌다. 미국 유학 시절 낳은 딸이 미국 시민권을 유지하다 외국인 자녀 특례입학 혜택을 받으려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박 장관은 즉시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사죄했다. 그러나 법무장관이 편법 꼬리를 달면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지적에 청와대는 경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엔 박양실 보사부 장관의 부동산 투기 의혹도 제기됐다.

청와대는 한밤에 박관용 비서실장 주재로 긴급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었다. 정무·민정수석 등이 사실을 확인하고 YS에게 경질을 건의할지를 토의했다. 박 실장은 회의 결과를 밤 11시 YS에게 보고했다. 이후 YS는 두 장관의 사표를 전격 수리하고 후임 장관을 임명했다. 사건이 터진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YS정부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씨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위기 때마다 수석회의를 했다. 의견 차도 있었지만 다들 대통령을 모시는 입장에서 팀워크를 발휘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치를 공유한 동지적 결합이라 대통령의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22일 쇠고기 파문에 유감을 표명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중앙포토]

역대 정부에서도 돌발 사건과 위기는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갈렸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 이후 박근혜정부와 청와대가 보여준 위기 관리 능력은 ‘참사 수준’이란 말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직 기강 확립 ▶인사위원회의 다면·상시 검증 체제 전환 등 대책을 내놓았지만 효과는 불투명하다. 이에 역대 정부 인사들에게 청와대가 어떻게 운영돼야 할지 조언을 들어봤다.

비서실장 중심으로 기강 잡아라
청와대엔 각 부처와 정당의 핵심 인력이 모인다. 공직 경험이 없는 정치 참모도 많아 초기엔 청와대 기강이 흐트러지기 쉽다는 게 역대 정부 인사들의 말이다.

YS정부 공보수석을 지낸 윤여준씨는 “YS정부 초기에도 공직 경험이 없는 상도동 가신은 기강이 느슨하고, 윗사람을 우습게 알고, 말을 듣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비서실장과 수석이 기강을 잡으니 곧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이어 “대통령이 순방을 가면 비서실장은 비상근무 체제로, 늘 통신을 열어놓고 현지 상황을 실시간 파악하며 수석들을 지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비서실장이 늘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비서실장의 역할은 박정희정부에서 9년3개월간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도 강조한다. 그는 저서 ?아, 박정희?에서 비서실 축소와 공보·정무수석 인사 등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관철시켰던 일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실장 소신대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비서실장의 입지가 넓었다는 얘기다. 김정렴씨는 기강도 직접 잡았다. “청와대 직원이 한가하면 불필요하게 행정부에 간섭하기 쉬울 거라 판단했다. 비서실을 빙자하는 소지를 줄이려고 모든 직원에게 청와대 표시가 들어간 명함 사용을 금지시켰다. 지시는 재임 중 철저하게 지켜졌다.”

인적 쇄신으로 내부 갈등 소지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고재방씨는 “결국 이남기 홍보수석과 윤창중 전 대변인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지만 현 청와대엔 수석실마다 한 명씩 윤 전 대변인 같은 박 대통령의 핫라인이 심어져 있다고 들었다”며 “그러면 수석이 수석실을 장악하기 어렵고 조직 단합이 어려우니 빨리 인적 쇄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보고 통로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노무현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광재씨는 “노 대통령은 (보수적인) 김진표 경제부총리와 진보적인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을 같이 쓰는 등 색깔 다른 이들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참모들은 자신과 관련된 사안일수록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지만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있으면 정보를 숨기지 못한다”며 “노 대통령은 성격상 숨기는 걸 싫어해 참모들을 다 불러 현장에서 바로 정보를 공개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이원종씨도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동지의식을 강조하며 “YS 당시 수석들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출세하러 청와대에 간 게 아니라 대통령을 모시러 간 것이란 인식이 분명했다”고 전했다.

소통 위해 행정관도 적극 나서야
청와대 내부 소통의 중요성은 돌발 이슈가 터질 때마다 확인됐다.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 뒤 광우병 공포와 촛불집회가 확산됐지만 이명박 청와대는 지리멸렬했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솔직히 쇠고기 협상이 대통령 미국 방문 때 타결되는지 몰랐다. 경제·외교안보수석에게 ‘협상이 타결되나’라고 물어도 답해주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제대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고 인터넷 여론에도 깜깜해 “언론비서관실에서 인터넷을 검색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정무 라인도 허약해 이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제부터 모든 수석과 비서관이 정무적인 역할을 하라. 모두 정무 라인이라 생각하라”고 질책했다. 결국 지지율은 20%대로 급락했고 이 대통령은 세 차례나 머리를 숙이며 대국민 담화를 해야 했다.

반면에 노무현 정부 초인 2003년 4월 터진 화물연대 파업은 내부 소통 덕분에 뒤늦게나마 대처한 사례다. 당시 국정상황실 정책팀장(행정관)이던 박남춘(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관련 부처는 신임 대통령에게 보고를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이에 박 의원 등이 “직접 사태를 수습하자”고 판단해 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해외순방 출발 전날인 토요일 아침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해결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박정희정부 때도 소통은 활발한 편이었다. 김정렴씨는 “청와대 특별보좌관들은 단독 또는 합동으로 언제나 대통령에게 진언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특보 전원과 자주 막걸리를 곁들여 만찬하면서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했다. 참모들은 대통령에 대한 시중의 비판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어느 교수가 “대통령의 유세는 권위주의적이고 국민을 무시하는 듯하다. 간덩이가 부었다”고 비판한 걸 대통령에게 보고할지를 놓고 토론을 벌여 결국 ‘한 국민의 말’로 보고했다. 그뒤 대통령의 유세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명박정부 후기 정무수석을 지낸 김효재씨는 “결국 팩트 파인딩(사실 확인)이 중요하다. 보고를 할 땐 자기 직을 걸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한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직언하기 어려울 땐 그 얘기를 할 수 있는 위치의 (청와대 바깥) 분들과 (대통령과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 자연스레 전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또 “청와대에 문제가 생기면 위기를 탈출할 힘은 여당에서 얻어야 한다. 정무수석실이 여당을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위기 시 의사 결정 시스템·매뉴얼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노무현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대통령에 대한 직접 보고 체계만 있지 집합적 의사 결정체는 없는 게 현재 청와대 문화가 아닐까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고재방씨도 “DJ정부 때는 위기 관리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 외국인 회사에 용역을 줬다. 이번에도 매뉴얼과 시스템을 만드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대변인은 누구보다 책임 의식 강해야
청와대 대변인과 관련, 일부 인사는 김대중정부 때까지만 해도 홍보수석(공보수석)이 대변인을 겸하는 등 정권 핵심 인사가 대변인을 맡았는데 지금은 격이 낮아졌다고 지적했다. 박정희정부 시절 청와대를 출입한 성병욱 전 중앙일보 기자는 “당시 대변인은 공보수석과 겸직이라 돌아가는 상황에 정통했다”고 전했다. 이원종씨도 “YS 때는 대변인이 공보수석이라 다른 수석들과 논의하며 대통령 생각을 정리했다”며 “그런 체제가 책임의식을 더 갖게 했다”고 말했다. 홍보수석과 대변인이 이원화된 건 노무현정부 때부터다. 홍보수석은 홍보 전략을 수립하고, 대변인은 출입기자에게 브리핑을 하는 체제다. 일각에선 윤창중 사건 때 홍보수석과 대변인 간 상하관계가 애매했다고 문제를 지적한다.

역대 정부 인사들은 대변인이 남다른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재방씨는 “DJ 때는 중량감 있는 대변인이 모든 회의에 배석하고 메모하는 엄청난 육체적 노동을 했다. 대변인은 정상회담을 하고 오면 몸무게가 몇㎏ 빠졌다”며 “토씨라도 잘못되면 큰일 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철저히 관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윤여준씨는 “대변인은 이미 밥을 먹었더라도 기자들과 또 밥 먹으러 가고 기자들을 늘 살펴야 한다. 기자들과 함께 하니 공직자 중에서도 윤리 규범을 더 잘 지켜야 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백일현·류정화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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