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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일 만에 대국민 사과 … 노·DJ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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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77일 만에 사과를 했다. 박 대통령 취임 33일째인 지난 3월 30일 새 정부의 장·차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낙마하자 비서실장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취임 46일 만인 지난달 12일 민주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만찬에서도 인사 파동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13일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에 대해 사과했다. 이번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모두발언 형식의 대국민 사과였다. 역대 정부의 대국민 사과 중 가장 이른 사과 기록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10개월째인 1993년 12월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을 낸 게 첫 사과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후 1년4개월 만인 99년 6월 ‘옷 로비 사건’으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수회사인 장수천 투자 문제로 취임 92일 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86일 만에 첫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파문을 수습하고 국면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타이밍이나 내용에 따라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인 2003년 5월 생수회사인 장수천 투자금을 둘러싼 논란이 일자 기자회견을 열고 “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이유와 과정을 불문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해선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고 사과했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민주당 유인태 의원은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선 소위 야인 시절에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것이라 본인이 억울한 측면이 있었지만, 화끈한 성격 덕분에 바로 사과할 수 있었다”며 “무슨 일이든지 자꾸 변명을 하려고 하다 보면 일이 더 꼬이고 상황이 더 오래간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불거진 ‘옷 로비 사건’ 회견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킨 경우다.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된 최순영 대한생명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당시 강인덕 통일부 장관의 부인 배정숙씨 등을 통해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에게 수천만원대의 옷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여론이 요동쳤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몽골 순방에서 돌아온 김 전 대통령은 “언론이 마녀사냥을 벌이고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여론의 반발을 샀다. 결국 이 사건은 국회 청문회와 특검으로까지 이어졌다.

 역대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의 사과와 관련해 ‘타이밍’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유인태 의원은 “윤 전 대변인 사건의 경우 청와대가 수습 과정에서 뭔가 덮어보려고 하다가 새나가면서 오히려 청와대의 해명이 엉켜버렸다”고 진단한 뒤 “이럴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 투명하게 밝히고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 국민들께 양해를 구하고, 책임질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명박정부 때 청와대 참모를 지낸 여권 인사는 익명을 요청하며 “첫 번째 사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홍보수석의 사과라는 게 곧 대통령의 사과인데, 대통령에게 사과해 사과의 진정성을 떨어뜨리고 ‘그게 무슨 사과냐’는 역효과를 낳았다”며 “사과하는 사람부터 도마뱀 꼬리 자르기 식이 아니라 더 겸허한 자세로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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