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간탐험 (52) - 피트 로즈, WWF 링에 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최대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는 미국 뿐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일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레슬매니아(Wrestlemania)'라는 이벤트는 WWF의 최대 행사이자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벤트 중 하나이다.

1998년 3월 NBA 보스턴 셀틱스의 홈구장인 플릿 센터에서 벌어진 레슬매니아14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관심을 끌었다.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는 팬들에게도 그러했다.

바로 전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과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4,256개로 통산 최다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팀을 걸고 야구도박을 한 혐의로 1989년 메이저리그에서 영구 제명당한 '찰리 허슬(Charlie Hurstle)' 피트 로즈가 등장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프로레슬링 무대의 출현은 로즈의 악동이미지와 맞물려 CNN등 주력 언론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레슬매니아14는 개막되었고 경기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검정 턱시도 차림의 피트 로즈가 드디어 모습을 나타냈다. 그가 할 일은 언더테이커(The Undertaker)와 케인(Kane)이라는 두 거구가 맞붙는 시합에서 두 선수를 소개하는 특별 링아나운서였다.

비록 명예의 전당을 비롯해 메이저리그에서 불명예스럽게 영구제명 당한 피트 로즈였지만 플릿 센터를 가득 메운 2만 가까운 팬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링에 오른 로즈가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안녕하시오, 보스턴팬들. 패배자들의 도시에 다시 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것은 1975년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당시 로즈가 이끌던 신시내티 레즈에 패한 것을 비꼬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환호는 엄청난 야유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거리낌없이 보스턴의 팬들의 심기를 계속 건드렸다.

"벅키 덴트가 안부 전합디다!"

벅키 덴트는 1978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공동 1위로 시즌을 마친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간의 플레이오프에서 펜웨이파크의 그린몬스터를 살짝 넘기는-다른 구장 같으면 쉽게 잡히는 높은 플라이 볼이었지만-역전 3점 홈런을 때림으로써 레드삭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좌절시켰던 장본인.

로즈의 망언은 끝날 줄 모르고 오히려 극에 달했다.

"사실 나는 빌 버크너를 위해 티켓 몇 장을 두고 오려 했소. 하지만 그는 그것을 허리굽혀 줍지 못하더군요!"

그것은 1986년 뉴욕 메츠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메츠의 무키 윌슨의 평범한 내야땅볼을 가랑이 사이로 빠뜨리면서 레드삭스를 패배로 이끌었던 당시 1루수 빌 버크너의 실책을 비꼬는 것이었다. 그것은 레드삭스가 몸서리치는 "밤비노의 저주"의 절정이었다.

보스턴의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경기장은 엄청난 크기의 야유로 가득 찼다. 심지어 물병과 오물이 링 안으로 날아들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로즈의 망언은 이후 계속되지 못했다. 조명이 갑자기 붉게 변하더니 위아래 붉은 유니폼에 얼굴에 마스크를 쓴 213cm의 거구인 케인이라는 레슬러가 등장한 것.

그는 올라오자 마자 로즈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게 그에게 파일드라이버(상대를 거꾸로 들어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는 기술)를 선사한 것. 야유로 가득 찼던 경기장은 일순간 큰 환호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결국 큰 충격을 입은 로즈는 진행요원의 부축을 받고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를 공격했던 케인이라는 선수가 WWF내에서 '빅 레드 머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닉한 것이었다.(시간탐험(10) 참고)

재밌는 것은 그의 멘트는 팬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사전에 예정된 각본이었지만 그가 레슬러에게 공격 받으리라는 것은 로즈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철저한 사전 각본에 의해 경기가 치뤄지는 미국 프로레슬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즈가 출연을 제의 받고 계약하기 전 WWF측은 단지 어떤 뜻하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놀라지 말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 해 호되게 혼이 난 로즈는 이듬해에도 레슬매니아에 출연하게 된다. 99년에는 한술 더 떠 닭인형을 뒤집어쓰고 우스광스러운 닭춤까지 선보였다. 그리고는 각목으로 지난해 자신을 공격했던 케인을 공격했다가 또다시 파일드라이버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로즈는 그 이후 레슬링 무대에 서는 일은 없었다. 비록 영구제명이후 경제적인 이유와 관심 유도를 위한 일종의 해프닝이었지만 전설의 야구스타가 엄청난 체구의 레슬러에게 공격받아 쓰러지는 모습은 야구팬들에게 있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작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레슬링 링이 아니라 명예의 전당이며 야구 그라운드가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이석무 명예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