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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네 생활 주변에선 요즘 가계부 「붐」이 일고 있다. 여성 잡지들은 신정호엔 으레 두툼한 가계부 한권씩을 덤으로 얹어준다. 「부록」이 아니라도 문방구점에 가면 형형색색의 가계부들이 즐비하다. 호화판 표지를 넘기면 「그이의 용돈」이니 「이달의 곗돈」이니 「아기 맘마」니… 항목들도 다채롭다.
가령 중류급 서민인 월급 「1만5천원」짜리의 쌈지끈을 쥐고 있는 주부의 경우, 하루 예산은 평균 5백원 꼴이다. 어떤 가계부는 하루분의 항목이 무려 17가지이다.
5백원을 쪼개고 또 쪼개고 해야하는 주부들의 산술엔 은근히 동정도 간다. 그래도 하루마다의 끝자리에서 저축난이 두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익살스러운 기분도 든다. 『이건 장식품이겠지!』 하는 고소이다.
서구에서는 가계부가 따로 없다. 「수입」 「지출」로 나누어진 출납장이 고작이다.
영국의 소비 경제 연구가인 「로버트·밀러」씨가 최근 영국 주부 3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0%는 전연 가계의 수지를 따지지 않고 있었다. 20%는 돈이 있는 만큼 쏜다는 「주먹구구 주부」이고, 겨우 10%가 수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무슨 까닭인가.
우선 「레이디·퍼스트」의 신화 속에 사는 서구에서도 쌈지끈만은 남편이 굳세게 쥐고 있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부의 경제권이 일약 「파쇼」화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집세·자동차 월부·세금·보험·광열비·「퍼니처」 (가구) 등은 모두 남편이 수표로 지불해 버린다. 식료·잡화·의료나 주부의 몫이다. 「밀러」씨의 「인터뷰」에서 한 영국 주부가 답변하는 것을 들어보자.
『월말마다 난파선이 가라앉지 않고 떠있는 것을 알게 되면 「쇼크」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나의 경험으로 가계부를 적는 것은 걱정거리를 사는 일 밖엔 안됩니다. 오히려 월말의 「쇼크」 때문에 「드라이·진」 (술의 일종)이라도 한병 사게 되면 공연히 지출의 한 항목이 늘어나고 말지요.』
하긴, 우리네 주부들도 경제권을 돌려주자는 시위라도 할까봐 겁이 난다. 한국의 남편들은 공처가이기 전에 「공금가」들이다. 새해엔 「저축」난이 비좁아, 주부들이 비명을 지르는 꿈이라도 꾸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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