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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은 현재진행형 동사 시대 맞춰 바뀌는 게 맞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크로스오버’란 바로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42)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9년 전부터 ‘차이 김영진’이란 이름으로 한복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그 옷들은 정석과는 거리가 멀다. 망사와 면, 레이스로 한복을 만드는 일탈은 기본이요, 여느 한복처럼 A자로 퍼지는 실루엣 대신 엉덩이를 부풀렸다 좁아 드는 항아리 라인을 고수한다.

그렇게 ‘모던 한복’이라는 새 분야를 만드는가 싶었는데 최근엔 또 생뚱맞은 일을 벌였다. ‘한복’이라는 꼬리표를 아예 떼고, ‘차이 킴’이란 기성복을 만들기 시작한 것. 그는 이를 두고 “동에서 서로만 움직이다 이번엔 서에서 동으로 가보는 중”이라는 알 듯 말 듯한 설명을 했다. 지난달 26일 그의 서울 한남동 매장을 찾아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세계 복식에 한국적 요소 스민 세컨드 브랜드

한복 디자이너의 세컨드 브랜드라고 해서 대중적인 생활 한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여밈 없이 걸치는 코트, 허리선을 가슴 밑으로 올린 랩스타일 블라우스…. 색깔까지 감색·베이지·흰색 등 자연색을 위주로 삼아 어찌 보면 중세 수도사의 옷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한복의 두루마기 같기도 했다.

-어떤 아이디어로 만들었나요.

“각국 복식을 공부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이거 한복이랑 비슷하네’ 싶은 게 있었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복식 책만 봐도 실루엣이 닮았어요. 동서양이 걸쳐 있다고 느꼈는데 아마도 제가 한복을 직접 만들어 봤기 때문일 겁니다. 둘을 하나로 녹이면 어떨까 싶었고, 여행자의 옷으로 컨셉트를 잡았죠.”

-그럼에도 어쩐지 한복 같습니다.

“아마 몸에 꼭 끼는 서양식 입체 패턴이 아니라 한복의 평면식이라 그럴 거예요. 하지만 한복을 의식하고 만들진 않았어요. 오히려 한복 스트레스, 그러니까 전통에 대한 죄의식 없이 자유롭게 옷을 만들고 싶었죠. 이 옷은 한복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입고 싶으냐 아니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저 사람들이 ‘좀 특이한 기성복이네. 그런데 한국적인 뭐가 있구나’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한복은 패션 … 갖고 싶다는 욕망 심어줘야

그는 한복이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했다. 아이엔지(ing), 즉 변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란 얘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시도된 것이 웨딩드레스 대신 입는 레이스 한복이나 단품으로 입는 한복 재킷 등이다. 재킷의 경우 16세기 연안김씨 출토 복식의 저고리를 응용한 것으로, 요즘 트렌드에 맞게 앞뒤 길이를 달리하고 ‘샤넬 원단’으로 알려진 트위드를 사용하는 등 소재에 변화를 주었다. 저고리-치마의 틀을 깨고 치마와 바지 어느 평상복과 짝지어 입어도 어색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학계나 업계에서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반응을 듣고 싶지도 않고요. 일반 소비자들의 평가가 중요한 거죠. 한복을 자꾸 어떤 틀에 가두지 말고 패션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왜 한복을 안 입느냐고 서운해 할 게 아니라 대중에게 갖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줘야죠. 패션은 욕망이에요.”

-전통 계승이라는 의미도 있지 않나요.

“제 옷 역시 전통에서 나온 것이고 시대에 맞게 변형을 한 것뿐이에요. 전 제 방식이 더 솔직하다고 봐요. 무슨 뜻이냐면 예전에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가 ‘맥적’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이걸 궁중요리로 재현한답시고 고기를 양념해 세 번씩 찬물에 담갔다가 다시 굽는다고. 그런데 그게 참 본질을 모르는 일이라고요. 당시엔 고기에 근육이 많아 냉침요법을 해야 부드러워서 그런 건데 요즘 고기는 그렇게 하면 육즙이 다 빠져나간다는 거죠. 결국 목적은 재현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인데도 (바꾸는 게) 겁이 나 흉내만 내고 있는 거예요. 한복도 마찬가지죠. 결국 예뻐 보여야 하는 게 본질이잖아요. 예식장이 다 우아한 서양 장식인데 울긋불긋 비단 한복이 어울리나요?”

그러면서 또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언젠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식당에 갔단다. 그런데 좌식 테이블로 들어가다 치맛자락이 길다 보니 물컵을 쏟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때 느꼈어요. 요즘 시대에 한복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구나, 사람이 미어터지는 일상에서 좀 불편할 수도 있겠구나라고요.” 그는 한복이 불편하다면 고치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고, 이제 레깅스와 탱크톱 위에 한복 재킷을 걸치고 이태원 클럽을 찾는다.

-한복이 비싼 것도 단점입니다.

“재킷이 250만원쯤 해요. 그런데 디오르니 루이뷔통이니 블라우스 하나 가격도 그 정도 하지 않나요? 맞춤에 손바느질까지 하는데도 우리 것이 비싸면 난리를 치죠. 한복이 본전 생각나는 혼수용이 아니라 럭셔리 패션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질 걸요.”

루이뷔통서 일하다 한복 디자이너로 변신

대화 틈틈이 그는 한복을 해외 럭셔리 브랜드와 비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 자체가 이 둘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90년대 전통 극단 ‘연’에서 청춘을 바쳤다. 20여 스태프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고된 날들이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져 연극판을 떠났고 패션업계로 발을 들였다. 디자인 한번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두 시간이나 인사 담당자 앞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떠들었던 덕분’이었다. 수입 정장 브랜드 ‘체루티’를 거쳐 2000년까지 루이뷔통의 수퍼바이저로 남성복 의류 팀장을 맡았다.

-한복 디자이너로의 전직이 엉뚱합니다.

“명품업계에서 일한 게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루이뷔통도 시작은 한 장인의 트렁크였잖아요. 오랜 역사를 지닌 제품을 브랜드화하고 패션 공화국으로 키워 낸 거죠. 당시 신제품이 나오면 직원 모두 그 역사라는 옷을 입혀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대단하게 여겼죠. 그런 걸 보면서 우리 꽃신도, 한복도 저런 과거가 있는데 현재가 없어 브랜드로 키우지 못했구나 아쉬웠어요.”

관련 서적을 연구하고 침선장 박광훈(서울시 무형문화재) 선생에게 사사하며 기본기를 다진 뒤 4년 만에 ‘차이 김영진’이란 브랜드를 냈다.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갤러리 대표나 화가·국악인 등 그의 옷을 찾아주는 이들도 제법 늘었다. 크로스포인트 손혜원 대표,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비채나 조희경 대표, 무이무이 송숙 대표 등 다른 분야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로부터 영감도 얻는다.

-지난 10년간 보람이 있다면.

“한복이 아직은 혼수가 가장 큰 수요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엄마를 데리고 찾아와요. 꼭 여기서 하고 싶다고. 엄마 입장에선 단골집도 따로 있고 그럴 텐데 고집을 부린 거죠. 한복이 브랜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거라 기뻐요.”

-앞으로의 계획은.

“거창한 포부는 없어요. 재미있는 옷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 외에는. 하고 싶을 때 저지르자, 이게 제 모토죠. 저는 사업가가 아니라 디자이너니까요.”

그러면서 이번 주말 일정을 귀띔했다. 제주도 한 농장에서 열리는 티파티를 찾아 ‘유랑 매장’을 연다는 것. 외국인도 20여 명 모이는 자리에 일종의 팝업 스토어를 기획한 셈이다. 앞으로도 옷의 분위기와 맞는 공간이 생기면 옷을 싸들고 가 팔아볼 요량이란다. “유랑 매장이 좀 더 잘되면 소리꾼과도 함께 다녀볼까 해요. 장사도 하면서 문화 행사로 발전시키면 재미있지 않겠어요.”

글 이도은 기자 ,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차이 아르떼, 윤상명 포토그래퍼, 루브르네프, 모델 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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