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프 절벽'은 없다 … 크루그먼의 대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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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학계가 큰 논쟁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국가부채’를 둘러싼 격론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등 세계 석학들이 대거 뛰어들었다. 최근 반세기 동안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쟁점은 ‘국가부채가 경제 성장의 적(敵)인가’ 여부다. 논점이 분명한 만큼 학자들 간의 전선도 뚜렷하다. 이른바 ‘긴축파’와 ‘성장파’다.

메르켈·올랑드도 가세한 싸움

 긴축파의 대표 논객은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다. 성장파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버티고 있다. 로고프 쪽은 “국가부채가 많았을 때 성장률이 낮아진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정부 빚이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얘기다. 크루그먼 쪽은 거꾸로 “경기 침체(저성장) 때문에 국가 빚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긴축론자들이 인과관계를 잘못 읽었다는 지적이다.

 논쟁은 미국과 유럽 등의 재정위기와 직결돼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미국 공화당,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등은 로고프 주장에 동조한다. 반면에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프랑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이탈리아 엔리코 레타 총리 등은 크루그먼 편이다.

 로고프와 메르켈 등은 “당장 힘들더라도 빚을 줄여야 나중에 더 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크루그먼과 올랑드 등은 “긴축이 경제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받아친다.

 로리 나이트 전 옥스퍼드대 경영대 학장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뒤엉키는 바람에 논쟁이 더욱 뜨거워졌다”며 “3년 전에 발표된 짧은 논문 하나가 이런 논쟁으로 비화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문제의 논문은 바로 로고프와 카멘 라인하트 하버드대 교수가 2010년 4월에 발표한 6쪽짜리 ‘부채 시대의 성장(Growth in a time of Debt)’이다. 논문 발표 타이밍은 절묘했다. 그리스 재정위기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때다.

 로고프 교수 등은 미국·독일·한국 등 20개 나라 국가부채 데이터와 성장률을 비교·분석한 결과를 근거로 “국내총생산(GDP)과 견준 국가부채 비율이 90%가 넘으면 성장률이 가파르게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로고프-라인하트 절벽’이다.

 두 사람의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만든 일등공신이 바로 독일 메르켈 총리였다. 그는 틈만 나면 “국가 빚을 줄이지 않고는 지속 가능한 성장은 없다”고 설파했다.

대학원생이 오류 발견해 흐름 바꿔

 그런데 올 3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학생인 로버트 헌든(28)이 로고프 교수 등이 과거 통계 데이터를 누락 또는 생략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헌든의 지도교수인 로버트 폴린 등이 로고프 반박 논문을 올 4월 발표했다. 바로 ‘많은 공공부채가 지속적으로 성장을 가로막는가(Does High Public Debt Consistently Stifle Economic Growth? A Critique of Reinhart and Rogof)’였다.

헌든과 폴린은 논문에서 “국가부채 비율이 90%를 넘어도 꾸준히 성장한 나라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로고프 교수도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데이터 처리에 일부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다만 그는 “실수를 감안하더라도 연구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회복 더딘 미국 경제상황도 영향

 WSJ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글로벌 경제 상황과 맞물려 28세 대학원생의 발견이 국가부채 논쟁을 촉발시켰다”며 “그동안 침묵하던 성장론자들이 대반격에 나섰다”고 전했다. 크루그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 미국 경제정책연구소(CEPR) 딘 베이커 소장 등이 긴축론 공격에 앞장섰다. 크루그먼은 최근 뉴욕타임스(NYT)에 쓴 칼럼에서 “(로고프 등의 주장이) 학술적 포장을 하고 있지만 1% 부유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마틴 울프는 FT 칼럼에서 “영국은 19세기 산업혁명기 직전 국가부채가 240%에 달했는데도 기록적인 성장을 일궈냈다”고 강조했다.

 논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미국에선 올여름 연방정부 부채한도 확대를 놓고 오바마와 공화당이 또 씨름을 해야 한다. 독일에선 9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긴축의 부작용(침체)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전 옥스퍼드 경영대 학장인 나이트는 “이번 논쟁에서 긴축파가 밀리면 각국의 경제 정책에도 적잖은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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