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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성공하는 정상회담, 실패하는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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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2001년 3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은 워싱턴행을 서둘렀다. 1월 21일 취임한 부시 대통령이 미처 대북정책 검토도 끝내지 못한 상황이어서 주변에서는 방미 연기를 권유했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다.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부시의 지지를 얻고 싶은 다급함 때문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회담의 성과는 화려했다. 공동발표문에는 한·미 동맹 강화, 대북 포용정책 지지, 페리프로세스 유지 같은 말들이 담겼지만 실상은 달랐다. 참담한 실패였다.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this man(이 양반)’이라는 외교적 박대를 받아서만이 아니다. 부시의 대북인식과 정책을 전혀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도 성공적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고, 미국 측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파격적 발언도 쏟아냈다. “53년 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부시는 냉담했고, 노 대통령에 대한 워싱턴의 불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국내의 반응도 매서웠다. ‘대북 포용정책의 후퇴’이자 ‘대미 굴욕외교’라는 비판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도 설득하지 못하고 국내 지지 세력으로부터도 비난받는 최악의 결과였다.

 2008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은 방미 직전 기자회견에서 “10년간 손상된 한·미 관계를 우선적으로 개선하고 양국 관계에 신뢰를 가져오는 것”이 정상회담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환대는 대단했다. 부시 대통령 부부는 이 대통령 부부를 캠프데이비드 별장에 초청해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인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이 대통령은 두 가지로 화답했다. 하나는 캠프데이비드 도착 11시간 전에 그간 지지부진하던 쇠고기협상 타결을 전격 발표케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저녁만찬 메뉴로 광우병 우려가 있는 32개월짜리 몬태나산 쇠고기 스테이크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덧붙여 한·미 동맹을 가치·신뢰·전략동맹으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감동했을지 모르지만 국내 정서는 정반대였다. 촛불시위라는 국민저항은 미국에서 받은 환대의 대가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처절한 상처였다.

 다음 달 7일 박근혜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 미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도 한다고 한다. 이번 방미를 성공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한창 고민 중일 것이다. 대북 제재에 대한 국제공조 강화, 확장억지와 핵우산 재확인,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 미사일방어 공조 같은 강경기조에 방점을 찍으면 오바마 행정부와 한국의 보수세력은 분명 반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가도 분명하다. 남북관계는 한층 뒤틀리고 한·중 관계 역시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5년의 안보 불안이 재연되면서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라는 국정지표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국민도 늘어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얼마 전 언급했던 ‘서울 프로세스’라는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방미 기간 중에 선보인다는 것도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다. 이 구상을 굳이 워싱턴에서 제안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 프로세스’이니만큼 서울에서 발표하거나, 혹은 한·중·일 3국 정상회담 같은 테이블에서 펼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북관계가 군사적 충돌 위험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안에 무게를 싣는 일이 도리어 의제를 모호하게 만들어 방미 성과를 크게 희석시킬지 모른다는 염려도 든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정상회담에서 필요한 것은 돌직구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인 한반도 평화위기 극복을 위한 단도직입이다. 길지 않은 정상회담 시간 안에 박 대통령의 핵심 브랜드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각인시키고 위기극복을 위한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방안을 더불어 마련하는 동시에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 대안,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4자회담 개최 방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재개 같은 묘책이 구체적이고도 전향적인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불신과 신뢰, 대결과 협력 사이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이번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갈림길에 선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외교적 관성과 관료적 미사여구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대안으로 한반도의 신뢰구축과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다. 그의 어깨가 어느 때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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