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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고령화시대 … “노인까지 지갑 열 제품 찾아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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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한국 경제의 ‘저성장’을 당면 과제로 인식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자 하는 대기업이 눈길을 끌고 있다.

‘저성장 시대’ 전문가인 모타니 고스케 일본 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이 최근 롯데그룹 임원 강연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작은 사진은 모타니가 들고 온 산요전기의 스마트폰. 하단에 커다란 숫자 버튼을 달아 고령자도 쓰기 쉽게 했다. [사진 롯데그룹]

신동빈(58) 롯데그룹 회장은 25일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신사옥 7층 대강당에서 그룹 내 식품ㆍ유통ㆍ관광ㆍ서비스 관련 계열사의 주요 임원 100여 명을 불러 ‘저성장 시대의 생존전략’이라는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자로는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49) 일본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이 초빙됐다. 고스케는 『디플레이션의 정체』 저자로 유명하다. 이날 강의는 신 회장의 지시로 마련됐다. 신 회장은 지난 1월에도 그룹 내 팀장급 2000여 명에게 『리버스 이노베이션(Reverse Innovation)』이란 책을 선물로 줬다. 이 책은 신흥개발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선진국을 비롯한 주요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을 일궈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선진국의 눈이 아니라 개도국의 눈으로 본 제품이 역으로 혁신을 일궈낼 수 있다는 것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한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이 저성장의 늪에 빠진 상태에서 신시장 개척 같은 다양한 방법론으로 지속 성장을 일궈야 한다는 게 신 회장의 지론”이라며 “이런 의미에서 책 선물과 강연회가 준비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강연에 참석한 롯데그룹 백인수 미래전략센터 이사는 “저성장을 먼저 경험한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국내에 다가올 영향을 짐작할 계기가 됐다”며 “양질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못지않게 경제 트렌드 예측이 중요해진 셈”이라고 말했다. 강연에 앞선 2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모타니 수석연구원을 만났다. 아래는 일문일답.

-전 세계적인 경기 불황에 선진국이 힘겨워하는데.
“실제로 경기가 좋다 나쁘다고 말해도 일본이나 한국이 어떻게 될지, 기업이나 개인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GDP가 3% 성장한다고 해서 개별 기업의 매출이 3% 동일하게 오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위기 극복의 시작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개별 지표를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다.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일본은 100년에 한 번 오는 불황이라곤 하지만 유니클로나 닌텐도는 사상 최고의 수익을 냈다.”

인구변화가 GDP 같은 거시지표보다 중요
-그럼 일본이나 한국의 경제위기는 어디서 출발한다고 보나.
“흔히 유럽발 경제위기, 중국의 대두와 자원고갈 같은 것을 위기의 원인으로 꼽는 이가 많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너무 일반론이다.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일본 경제가 가장 크게 후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수출은 2007년 역사상 최고치인 80조 엔을 기록했다. 이는 버블 전성기인 1990년 41조 엔의 두 배에 육박하는 수치다. 하지만 일본 국민이 느끼는 고통은 이때가 사상 최악이었다. 내수 경기를 결정하는 건 취업자수의 증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매스컴이든 어디든 실업률 같은 숫자만 사용하고 취업자수의 절대값은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취업자수의 증감을 따져봐야 한다. 일본과 한국의 공통된 문제는 소비의 주체인 15~64세 사이의 ‘현역세대’가 줄고 있다는 점이다. 현역세대가 활발히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역세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 일본 소비자의 특징인데 자동차 같은 공산품 구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지만 먹거리에는 관심을 두는 이가 많다. 아무래도 노인층이 많아져서다. 한국도 비슷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캐주얼 제품도 젊은이만을 위한 것보다는 유니클로의 히트텍처럼 장년층까지 골고루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잘 팔린다. 결국 고령자가 물건을 사게 해야 한다. 닌텐도 ‘위’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은 불안한 미래에 대비해 돈을 아끼려는 경향이 강한 노인층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제품을 자꾸 만들어야 한다. 닛산의 2인승 스포츠카 페어레이디Z는 자동차에 ‘취미’란 요소를 부여해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소품종 다량생산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이나 애플은 소수 제품을 대량생산해 세계시장을 석권했는데.
“삼성처럼 세계시장을 석권한 극소수 기업은 괜찮겠지만 중소기업까지 모두 그럴 수는 없다. 사실 삼성도 스마트폰 이후에 더 큰 경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글로벌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는 계속해 틈새시장을 만들고 이에 걸맞은 제품을 내놔야 한다. 대기업도 기존 성장 전략을 재점검해야 한다. 일본 전자회사인 파나소닉이나 소니는 삼성전자에 계속 밀리지만 성장 전략을 바꾼 히타치는 오히려 더 큰 이익을 내고 있다.”

현역인구(15~64세) 감소가 불황 불러
모타니가 변신에 성공한 기업으로 꼽은 히타치는 2008년 7873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9년 취임한 가와무라 다카시 사장은 적자의 주요 원인인 일본 내 텔레비전 생산을 포기하고 하드디스크 사업을 정리하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대신 수(水)처리와 전력· 철도 같은 인프라를 핵심 사업으로 대체하고 회생하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2010년 2388억 엔, 2011년 3471억 엔의 흑자를 기록했다. 인프라가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소비재 매출은 2012년 전체의 10%까지 줄었다. 인프라 관련 사업은 총매출의 65%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확실한 체질 개선을 일궈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라는 인구 변화에 잘 적응한 회사는.
“일본의 유통업체인 ‘세븐앤아이’가 대표적인 예다. 현역인구의 감소와 동시에 가족구성원 수가 적어지는 추세를 제품에 반영했다. 도시락 같은 간단한 먹거리 상품을 다양하게 내놓아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같은 대형 매장보다는 소규모 점포에서 비용 대비 수익성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산요전기가 만들었는데 제품 하단에는 커다란 숫자 버튼을 달아 고령자도 쓰기 쉽게 했다.”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바꿔야
-저성장 시대에 개인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나.
“경기가 나쁠수록 흔히 하는 착각이 ‘도시와 지방 간 격차가 더 커진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이는 입증되지 않은 믿음이다. 일본의 경우 1990년도의 소매 판매액 수준을 100으로 볼 때 2006년 북쪽 지방인 아오모리의 소매 판매액은 98, 수도권은 96, 도쿄 내 도심 23개 구는 90이었다. 지방인 아오모리현이 훨씬 나은 수치다. 도쿄 23개 구의 매출을 매장 면적으로 나눠보면 ㎡ 당 연간 매출은 169만 엔(2006년 기준) 정도다. 아오모리현은 도심과 큰 격차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 연매출은 75만 엔이었다. 2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대신 지가(地價)는 3~4배 이상 도쿄가 비쌌다. 도쿄 같은 대도심은 ‘즐겁게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을 전국에서 불러모았지만 돈의 씀씀이를 늘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소매업 같은 장사를 시작하려는 경우라면 곱씹어봐야 할 대목 아닌가.”

-한국도 요즘 주택경기가 부진한데.
“과거 일본에선 ‘경기가 좋으니까 주택이 잘 팔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믿음이 ‘이대로 경기가 좋으면 얼마든지 주택은 계속 팔릴 것이다’라는 착각으로 이어졌다. 공급 과잉으로 이어지면서 주택 버블이 발생했다. 일본이 다시 과거와 같은 수준의 주택수요가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0’이다. 그 다음엔 가격붕괴, 즉 버블 붕괴가 기다렸다. 이런 버블의 발생이 왜 수도권과 오사카 같은 대도심에 집중됐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이는 바로 일본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1947~49년 출생자)의 진학과 취업의 흐름을 투영해 보면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하던 1970년대 말, 80년대 초 스키나 테니스, 전자오락 같은 산업이 활황이다가 그 뒤 시장이 축소된 것도 같은 이유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주택 수요자의 절대수가 감소한 이상 아무리 ‘호경기’라고 해도 과거와 같은 부동산 상승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모타니 고스케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개발은행에 입사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2010년에 낸 『디플레이션의 정체』는 경제경영서로는 드물게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이 책은 일본 경제잡지인 다이아몬드가 꼽은 2010년 베스트 경제서 3위에 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GDP가 좋다 나쁘다’ 같은 거시경제 수치는 기업이나 개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정보를 전혀 주지 못한다”며 “무역을 통해 국가 간 경쟁에서 이겨도 ‘내수 축소’라는 경제 노화현상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나라의 경제력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해외 59개국을 자비로 여행하고 자전거로 일본 전역의 46%를 달린 기인 생활로도 유명하다.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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