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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대, 진짜 보물섬을 찾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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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논설위원

보물지도, 외다리 실버, 소년 짐 …. 이쯤 대면 누구나 『보물섬』을 떠올릴 것이다. 1883년 로버트 스티븐슨이 이 소설을 발표한 뒤부터 보물섬의 실재 여부와 배경을 두고 여러 설이 난무했다. 그가 버진아일랜드 등 카리브해에 퍼져 있던 해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집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80여 개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소국(小國) 버진아일랜드는 오랫동안 보물탐사의 로망을 선사해 온 상상력 공작소였다.

 최근 이 소국이 진짜 보물선임이 확인된다. 다만 해적이 아닌 지구촌 실력자들이, 황금이 아닌 금융자산을 숨겼다는 것이다. 탐사대도 짐과 실버가 아니라 미국의 비영리 탐사보도기관이었다. 공공정직센터(CPI) 산하조직인 국제탐사언론인컨소시엄은 보물섬의 금융내역을 입수해 차례로 발표 중이다. 조세 회피를 목적으로 ‘종이 회사’를 세워놓고 자국의 재산을 빼돌린 사람의 명단이 까질 때마다 전 세계 언론은 바빠진다. 170개국 수천 명이 검증 대상에 올라 있다. 한국 국적자는 70여 명이지만 공개 일정은 후순위로 잡혀 있다. 단체 관계자는 “이 추세라면 내년까지 명단 공개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CPI는 얼마 전부터 미국 언론·학계의 관심 대상이었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등은 “차가운 진실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센터는 이를 제공한다” “배반적인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지식전달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사실 이 작은 단체의 힘은 독특하고 투철한 운영철학에서 나온다.

 미국 워싱턴 17번가. CPI를 방문한 것은 2004년 여름이었다. 센터 관계자는 “예산 400만 달러, 상근기자 20여 명으로 매년 40건 안팎의 탐사보도물을 내놓는다”고 했다. 지금은 예산 900만 달러에 상근기자 30여 명이다. 1989년 CBS PD였던 찰스 루이스가 자신의 유산을 털어 골조를 세운 뒤 기부를 받아 운영되고 있었다. 기부금 수령 원칙이 흥미로웠다. “정부·정당, 대기업, 노조, 익명 등 4곳 기부는 안 받습니다.” 정계와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세력의 압력이나 포퓰리즘에 휘둘릴 수 있어 노조·익명 기부도 배제한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운영예산을 누가 댈까. 공익재단과 중소기업인·변호사·회계사·의사 등이 주요 후원자라고 했다.

 주류언론과의 관계설정도 국내와 사뭇 달랐다. 보도결과물은 원칙적으로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한다. 하지만 취재·발표 과정에서 주류언론을 최대한 활용한다. 버진아일랜드의 자료 검증과정에도 전 세계 유력언론들이 참여 중이다. 독립언론이지만 구석을 쫓지 않고 미디어 생태계에 들어와 기존 매체와 손을 잡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걸리면 때린다. 센터가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이런 정치적 중립성이 기반이 됐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백악관이 정치자금을 모으려 링컨의 침실에 거액 기부자를 숙박시켰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부시 정부 시절에는 공화당의 뒷돈을 대는 군수업자가 이라크전 군수품을 싹쓸이했음을 탐사했다.

 취재팀 구성도 독특했다. 자유롭게 탐사보도를 원하는 젊은 기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기자, 인턴대학생이 뭉쳐 ‘프로젝트’ 취재를 한다. 열정과 세기, 도전정신을 합쳐 작은 비용으로 굿 저널리즘을 실천한다. 센터는 정치·재정회계·환경·사법·국가안보 등 주로 다섯 분야의 심층보도를 내놓는다. 서너 명이 한 팀을 이루어 반년 이상을 한 주제를 놓고 탐사한다. 취재가 끝나고 나면 인터넷에 올리고 단행본을 출간한다. 중편에서 장편 소설 분량의 기사가 나온다. 말이 보도기관이지 연구소나 마찬가지다.

 미디어 분야를 넘어, CPI가 추구하는 객관적·실증적·심층적인 공공성은 정파·이윤·포퓰리즘에 찌든 사회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또 작지만 열려 있고 효과적인 운영방식은 조직에 속해 있거나 조직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메시지를 던진다. 9년 전 들은 CPI 센터장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는 팩트(fact)를 추구하고 좋아합니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