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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의 새 시대|국제동양학자대회를 다녀와서-유홍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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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지난 8월13일부터 19일까지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열린 제27회 국제동양학자대회에서 참석하고 28일 귀국하였다. 이 국제동양학자대회는 1873년부터 개최되어 처음에는 근동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 서구각국의 학자들만이 「유럽」의 주요도시에서 모여 각자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그후 차차 교통이 발달하고 동양학연구열이 고조되게 됨에 이르러 10여년전부터 전세계의 동양학자들이 개최지를 바꾸어가면서 거의 3년에 한번씩 모이게 되었다.
나는 10년전에 독일「뮌헨」에서 열린 제24회 대회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한일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한국이 하나의 독립된 분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나는 3년전에 인도「뉴델리」에서 열린 제26회 대회에도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가지의 대회 공용어는 영·독·불어에 국한되었었다. 따라서 나는 이번에 세 번째로 이 국제동양학자대회에 참석하게되었는데 이 대회가 「아메리카」대륙에서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국의 동양학자들은 2년동안에 걸쳐 「포드」재단을 비롯한 30개 공사단체의 재정적인 원조를 얻어 이번에 미국의 주요 교육도시인 「안아버」의 「미시간」대학에서 이 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공용어를 국한함이 없어 어떠한 언어라도 사용할수 있게 하였으나 다만 학회종료후 제출되는 원고만은 영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뿐더러 미국 동양학자들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은 학자들이 이번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하기 위하여 동경·「파리」·「프랑크푸르트」로부터 각각 전세비행기가 백불이하의 운임을 받고 왕복하게하고 외국으로부터 참석한 학자들에게는 회기동안의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대회종료후 「워싱턴」「뉴요크」관광여행의 여비·숙비까지도 원조하여주는 후의와 친절을 베풀었다.
따라서 이번 대회에 참석하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학자의 총수는 50여개국으로부터 거의 2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실제 참석자는 1천5백명 정도였고 그중 발표할 논문제목을 제출한 학자수는 1천68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참석하기로 되어있던 소련학자 60여명을 비롯하여 몇 공산계열국가의 학자들이 뜻밖에도 참석하지 않아 발표된 논문수는 다소 줄어들었다. 이번 대회에서도 「아시아」지역을 10개분과로 나누어 발표장소를 달리하여 동시에 논문을 발표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1)고대근동지역 (2)근동과 「이슬람」세계 (3)고대 및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남부「아시아」 (4)근대남부「아시아」 (5)남동「아시아」 (6)고대중국 (7)근대중국 (8)일본 (9)한국 (10)중앙「아시아」와 「알타익」연구로 되어 있었다. 이번 대회의 첫날인 13일(일)에 있었던 개회식에서는 대회의장인 「펜실베니아」대학의 「놀맨·블라운」교수의 개회사와 개교1백50주년을 맞는 「미시간」대학총장의 환영사 및 전 대회의장인 인도대표를 비롯한 몇나라 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 다음날 상오9시부터 마지막 날인 19일 상오까지에는 분과별로 각각 논문의 발표가 진행되었는데 발표자가 많은 분과에서는 점심시간 두시간만을 제외하고 하오 4시반까지 그것이 진행되었다. 이밖에 14일하오 2시부터 18일 하오4시반까지에는 날마다 특별「패널·디스커션」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발표된 논문은 「고대동양과 고대 아메리카문화」라는 주제를 비롯하여 76편이 있었고 도서·음악회도 있었다.
한편 14일 하오4시반부터 두 시간 동안에는 「안아버」시장의 환영「파티」가 넓은 공원지대에서 있었고 16일 하오에는 「포드」박물관과 「그린필드·빌레지」를 구경하였다.
그리고 18일하오8시에는 「미시간」주지사와 「유엔」사무총장의 강연이 있었고 마지막날인 19일하오 2시에는 개회식이 있었다. 이 폐회식에서는 차기 대회개최장소의 결정권을 그 협의회에 일임한다고 발표하였으나 들은 바에 의하면 호주로 내정되었다 한다. 이번 대회에서 발표하기로 신청된 한국분과의 논문수는 27편을 헤아리고 있었는데 그것의 국가별 분포를 보면 한국인 18명 미국인 3명 소련인 3명 일본인 2명 「체코」인 1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인과 일본인의 불참으로 실제 발표된 논문은 20편 정도였다. 소련인이 발표하기로 되어있던 논문제목은 (1)한국에 있어서의 원시국가형태 (2)1866년부터 1895년까지의 한·미관계 (3)19세기후반의 교훈적 한국소설이었고 「체코」인은 「공민왕시대에 있어서의 몇가지 정치적 문제」를 발표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그는 참석하고도 발표를 하지 않았다.
한국분과의 논문도 그 성격에 따라 비슷한 것들을 모아 14일부터 19일까지의 사이에 발표하게 하였는데 (1)14일 상오에는 「한국의 새로운 선사자료」 (2)15일 상오에는 「원시한국국가」 (3)16일 상오에는 「변천에 있어서의 전통적 한국」 (4)17일 상오에는 「20세기한국의 몇가지문제」 (5)17일 하오에는 「현대한국의 재건」 (6)18일 상오에는 「한국의 신구문학」 (7)19일 상오에는 「사회학과 사회과학연구」라는 주제로 몇 편의 논문이 각각 30분동안 영어로 발표되고 10분동안의 질문에는 한국말이 혼용되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여도 무관하게 되어 있었으나 다른 분과에서도 거의 영어로 발표하고 질의에는 그 나라말을 쓰고 있었다.
이렇듯이 이번 대회에서 발표된 한국관계의 논문이 20여편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국분과가 개설된 이래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게 한 것이었다.
내가 참석한 1957년의 「뮌헨」대회에서는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1964년의 「뉴델리」대회에서는 8편정도가 발표되었었으니 그에 비하면 이번 대회에서는 큰 발전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학의 중요성이 국내외적으로 인식된 결과라고 보아 반가와 할 일이다. 따라서 미국의 저명한 대학, 예를 들면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컬럼비아」대학, 「프린스턴」대학, 「캘리포니아」대학,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같은 곳에서는 한국학과를 설치하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구미인으로서 한국학을 전공하려는 학도들에게는 자료의 입수난과 중복된 언어의 장벽 때문에 여러 가지의 고민이 있다고 들었다. 특히 한국학을 전공하려면 한문·일본어·한국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지망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난점을 다소나마 제거하여 보다 많은 구미인들이 한국학을 전공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한문으로 된 많은 자료를 국문 또는 영문으로 번역하여야 하며 우리학자를 보다 많이 해외로 보내야할 것을 제언한다. 끝으로 이번 대회에 우리학자 7명으로 하여금 참석하도록 여비를 지급하여준 「아시아」재단에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이 변변치못한 글을 맺는다<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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