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존경합니다 미스 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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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KBS ‘직장의 신’은 6년 전 MBC ‘하얀거탑’에 이어 일본판 원작을 능가하는 리메이크 드라마로 평가받지 않을까 싶다. 시작 전에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설정을 한국식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6회까지 방영된 현재, 원작의 매력을 살리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문제’라는, 요즘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를 시의적절하게 캐치해냈다는 게 가장 큰 성공 요인일 터다.

 2007년 니혼테레비에서 방영된 ‘파견의 품격’을 각색한 이 드라마는 설명을 붙이자면 ‘사회생활 코믹판타지’쯤 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된 시대, 자발적으로 계약직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스펙의 여왕’ 미스 김이 주인공이다. 문서 작성에서 화장실 청소, 외국어 통역까지 그 어떤 일도 완벽하게 해내는 미스 김은 직장인들의 이상을 극대화한 캐릭터다. “그건, 제 업무가 아닙니다” “회식은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입니다” 등 언젠가 한번쯤 외쳐보고 싶었으나 꿀꺽 삼키고 말았던 대사를 당당히 내뱉는 그녀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속을 확 풀어줬다.

KBS 월화드라마 ‘직장의 신’ 화면 캡처.

 반복되는 설정이 식상하다 싶으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건 미스 김 역할을 맡은 배우 김혜수의 힘이다. 원작 주인공인 시노하라 료코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김혜수가 단연 한 수 위다. 무표정한 직장인에서 퇴근 후의 섹시한 댄서,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버스기사까지 김혜수는 유쾌하게 변신한다. 마치 29년간의 연기 경험에서 쌓아온 내공을 ‘미스 김이 자격증 꺼내놓듯’ 하나하나 선보이고 있다 할까. 탬버린 코믹댄스? 당연히 할 수 있죠. 트로트와 함께하는 게장쇼는? 물론, 시켜만 주십시오. 혹시 빨간내복 입고 모델 워킹도 가능? 그럼요.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느낌.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10회로 간결하게 마무리되는 일본판과는 달리 16회 분량을 채워야 하는 한국판은 자꾸 집중력을 잃는다. 원작에선 양념거리였던 삼각관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명품을 든 정규직 vs 짝퉁을 든 비정규직’ 식으로 한국 드라마 특유의 대립 구도를 만드는 데도 여념이 없다. ‘정규직은 가해자요 비정규직은 피해자’라는 식으로 상황을 단순화해 ‘정신승리’를 거두는 게 이 드라마의 진짜 의도는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으며, 드라마의 대사처럼 다들 “이번 달도 무사히” 버텨내는 중이니까.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