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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거점 북괴 공작단 사건 제2차 발표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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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적사항
▲구속 황모(41세) 철학박사 본적 경남 사천군 사천읍 정의동 234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부암동 208의27 전 이화여대 부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부교수 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무과장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지도교수
▲구속 김모(25세) 본적 경북 의성군 안계면 용기동 827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27의 27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 모당 운영위원 무직
▲구속 현모(24세) 본적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산60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6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 서울대학교 출판부원
▲구속 이모(26세) 본적 전북 남원군 대강면 옥택리 295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11 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초대회장 언론인
▲구속 박모(26세) 본적 충북 제천군 제천읍 서부동 143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197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총무 언론인
▲구속 박모(27세) 본적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도화리 215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3동 254의 62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 언론인
▲구속 김모(23세) 본적 경기도 인천시 북성2가 12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9의 4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원 언론인
▲미체포 김모(23세) 본적 경북 안동군 서후면 금계리 876 주소 불상 전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원 무직
피의자 황모는 1926년 5월 10일 본적지에서 부 황모의 장남으로 출생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대학시절부터 사회과학을 전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주의사상을 포지하게 되었고 또한 학구의 목적으로 공산주의 서적을 계속 탐독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면 공산주의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어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자 망상하여 오던 끝에 6·25 전란이 발발하자 절호의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생각하고 1950년 8월 초순 북괴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여 북괴 보병 제19사단에 배속 분대장으로 남침작전에 가담 대한민국에 적대행위를 적극 감행하다가 1950년 10월 11일경 장단 지구 전선에서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 1952년 8월경 인민군입대를 속여 민간인이라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석방된
이후 서울 풍문여고 교사로 있다가 1957년 8월 일자 미상 경 서독 「훔볼트」재단의 장학금으로 서독에 유학케 되자 자신의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계속 공산주의에 대해 연구할 목적으로 가, 「뮌헨」대학에 재학 중 1958년 3월 일자 미상 경 관광차 공산권인 동백림시에 비법적으로 여행하여 약 1시간 동안 동 시 「스탈린」가를 구경한 후 옥호 미상 서점에서 국제공산당 강령인 「공산당선언」(칼마르크스, 엥겔스 공저, 1955년도 동백림 「디즈」출판사 발행 독문판) 1권(증 제1호), 「예술과 과학에 관하여」(소련 공산당 철학과 「스타노프」저, 1955년도 동백림 「디즈」출판사 발행 독문판) 1권(증 제2호), 김일성의 자유와 자주독립을 위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의 명령 및 연설집(1955년도 동백림 「디즈」출판사 발행 독문판) 1권(증 제4호) 등을 구입하여 서독으로 귀환 후 이를 탐독하고 서독에서 학업을 마치고 1960년 12월 초순 귀국 시 이를 반입하여 공산주의를 선전, 선동, 반 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할 때 자료로 사용할 목적 하에 1967년 6월 18일까지 자가에 불법은닉 보관하여둔 사실이 있고
나, 1958년 3월 중순 동백림으로부터 서백림에 귀환하여 서백림 「클휼스템담」가 소재 옥호 미상「호텔」에서 동백림 주재 북괴 동독대사관원으로서 공작요원인 김종근(32세 가량)을 상면하여 동「호텔」과 옥호 미상 「바」에서 김종근에게
①한국은 정치·경제가 부패하고 인간들이 타락되어 이 정권은 곧 망할 것이다.
②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난센스」이상의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북괴의 공작방향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③해방 이후 국토가 양단된 것은 비극이었으니 이번에는 자주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하면서 남북한 지역에서 외국군대를 철수시키고 또 남북군대를 점차적으로 감축시키며 남북 동수로 치안 유지할 병력만을 남기고 남북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북괴의 통일방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설명하였고
김종근으로부터 ①북괴의 공업화는 자체 역량으로 발전되어가고 있으며
②북괴에서는 소질만 있으면 전부 무료로 얼마든지 상급교육을 받을 수 있다.
③북괴의 사회주의 공업화정책과 경제정책을 기반으로 통일이 이루어져야 우리 민족은 잘 살수 있다는 등 내용의 선전 및 교양을 받은 후 김종근으로부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귀국하면
①북괴가 주장하는 통일방책에 따라 지식인, 학생층에 평화통일운동을 전개,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라.
②서독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 명단과 성분을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령을 받는 동시에 동백림에 소재한 북괴대사관 소재지 「메모」(약도)와 공작금조로 미화 1,200불을 수수함으로써 반 국가단체인 북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구성원인 북괴 동백림 주재 대사관 대남 공작요원과 회합하고 금품을 제공받은 사실이 있으며 전시 지령사항을 실천하기 위하여
①1958년 3월 일자 미상 경 서독 「뮌헨」대학 외국인 학생과에 예치된 유학생「카드」에서 한국인 유학생 권영훈 외 약 30명의 명단 및 본적·주소·출신교·생년월일 등을 발췌하여 전시 김종근에게 제보하였고
②1959년 9월 일자 미상 경 서독 「함부르크」대학에 전학하여 동 대학 외국인 학생과에 비치된 유학생「카드」에서 한국인 유학생 정신영 외 19명의 명단 및 본적·주소·출신교·생년월일 등을 발췌하여 전시 김종근에게 우송, 제보하였고
③1960년 8월 일자 미상 경 서독 「뮌헨」대학으로 다시 전학하여 동 대학 외국인 학생과에 비치된 외국인 학생「카드」에서 동 대학 한국인 유학생 이모 외 5명의 명단과 본적 주소 출신교 생년월일 등을 발췌하여 전시와 동일한 방법으로 김종근에게 우송 제보하는 등 3차에 걸쳐 지령사항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고
④1958년 7월 일자 미상 경 전시 김종근으로부터 우송되어온 (가)북괴 각 분야의 발전상을 선전한 화보 1권 (나)북괴 김일성의 8·15 해방 기념에 대한 연설 전문 1권 (다)북괴 농업발전에 대한 책자 1권 등 계 3권의 적서를 받아서 자기 서가에 비치하여 이의 선전내용인 북괴의 건설상과 공업발전상을 「뮌헨」대학 유학생 송모 태모, 「함부르크」거주 정모, 「함부르크」거주 이모(마인츠 의과대학 근무) 등 4명에게 화보를 보여주는 동시에 북괴는 기계류를 수요의 80% 이상 생산하고 있어 공업생산이 발달하였다고 북괴의 현실을 과대찬양 선전하여 반 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사실이 있으며 또한 서독 유학시 동백림에서 구입 보관하였던 전시 공산서적을 번역하여 1965년 4월 일자 미상 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부설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비정기 간행물인 「동아문화」지에 1965년 4월 제3집(증 제3호)에 「근대화의 제 문제」(사회구조와 민주주의와의 관련에서)라 제한 논문을 기고한바 이는 「공산당선언」 내용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공산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자신의 의사를 결부시켜 북괴가 지향하는 사회주의 노선에 적극동조 찬양하는 내용으로 문안을 작성 발표하여 서울대학교 학생을 비롯한 기타 지식인들에게 선전함으로써 자신의 공작사명을 수행 반 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한 사실이 있다.
위와 같이 서독에서 북괴 간첩으로 활약하던 황은 1960년 12월 초 귀국하여 북괴가 주장하는 통일방안에 따라 평화통일론을 학생층 및 지식인에게 선전하면서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라는 북괴 공작원 김종근의 지령에 의거 1962년 12월 모 정당에 침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3년 9월 25일 학계와 정계에 구축된 합법적 토대를 이용 학생 및 지식층에 조직을 확대하여 가며 북괴가 주장하는 평화통일방안을 선전, 사회주의혁명기운을 조성하였다가(소위 결정적 시기조성) 남한 내 M·L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4·19와 같은 민중봉기로 대한민국의 합헌정부를 전복하고 남한의 민주주의 제도를 변혁하고 북괴가 주장하는 통일방안에 따라 적화통일을 실현할 것을 기도하고 이념적으로 공명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과4년 이모를 비롯하여 동 대학생 박모, 현모, 김모, 박모, 조모 등 20여 명을 규합하여 동 대학 내에 합법을 가장한 학생서클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비합법단체를 창립하고 자신은 지도교수로서 첫 단계로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연구회를 표방하는 합법적인 간판을 표면에 내세우고 암암리에 사회주의혁명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 식민 반 보수 반 매판 반 외압 등 불온사상을 고취 선동함으로써 북괴가 지령하는 공작사명을 수행하고 투쟁의식을 조장하여 1963년 12월 초순경과 1964년 2월말일 경 등 전후 2·3차에 걸쳐서 서울 서대문구 부암동 208 소재 자가에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과 학생 김모와 회합하고 「민비」의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토의함에 있어 김모로부터
①서울상대 교수 박모의 견해인 굴욕적 한·일 회담은 반대하나 현 정권타도는 명분이 없다.
②전 최고의원 유모의 견해인 5·16 군사혁명에 실패하여 혁명동지가 동지를 잡아먹는 부패정권으로 탈락되었으므로 제2의 군사혁명이 일어나면 혁신정권수립을 위하여 보수계의 곽모, 혁신계의 서모, 학계의 박모, 재야정계의 유모 등을 지도층으로 혁신계 언론인 학계인사 등을 망라한 비상국민협의체를 구성해야한다.
③한양공대 전자공학과 학생 유모(전기 유모의 자)의 견해인 한·일 회담 반대 성토와 학생데모의 목적은 현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탈취함에 있다는 등의 의견보고를 받은 후
(가)현 정권의 한·일 회담은 매국적인 굴욕외교로서 민족반역행위이다. (나)한·일 회담의 성공은 한·일 군사동맹을 성취시켜 군사 「파쇼」정권인 현 정권이 강화되면 정권타도의 기회가 없어진다. (다)한국의 지성인은 이 기회에 한·일 굴욕외교에 대한 전 국민적 감정에 호소하여 4·19 학생「데모」와 같은 대대적인 「데모」와 난동을 전개하면 제3공화국을 완전 타도할 수 있다. (라)현 정권이 타도되면 우선 혁신적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진보적 보수계와 혁신계 재야계 등 각층에서 지도자를 선발하고 학계 언론계에서 중앙 정계에 대량 등장시켜야한다고 주장하여 폭력수단으로 국헌을 문란케 하며 정권을 번복하고 혁신적 사회주의체제로 변혁하기로 김모와 의견일치를 보았으며 민비를 모체로 서울시내 각 대학교 학생을 망라하여 한·일 회담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배후에서 1964년 3월 24일 5월 20일 6월 3일 등 불법 「데모」를 조종하여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국헌을 문란케 함으로써 북괴의 지령사항을 실천, 적을 이롭게 하였다.
기타 피의자 등은 1963년 12일자 미상 경부터 북괴 간첩인 황모 교수의 조종 하에 학생이란 신분을 이용 타인이 감지할 수 없는 합법적인 환경 하에서 학원 내에 조직을 확대하여가며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적 통일방안을 선전, 사회주의혁명기운을 조성하였으며 1964년 3월 중순 서울대 문리대 내에서 피의자 등은 황을 중심으로 수차 회합하고 제1단계로 1964년 3월 24일 동 대학교 문리대 교정에서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 집행식을 결행하고 학생 5백 여명을 동원하여 불법적 가두시위를 대대적으로 감행함으로써 그 파문이 전국학생「데모」를 유발케 하여 국가를 변란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이 있고 1964년 5월 16일 오후 7시경 동 대학 문리대 출입문 월편 소재 「진아춘」중국요정 2층에서 각 대학대표 21명이 회동, 김모의 사회 하에
①현 정부 및 공화당이 주창하는 민족주의는 가식적 허구의 것으로 단정하고 이를 말살하는 의미 하에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대규모적으로 거행키로 하는 한편 국회의사당까지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단행키로 합의 결정하고 동 준비책으로 김모는 연대·성대·동대·건대 등 각 학교별로 최소한 1,000명의 학생 동원을 담당하고 현모는 각 신문사에 연락 대대적으로 학생「데모」를 지지 선동토록 하는 공보활동과 한양대생 등 8,000명 동원을 담당하고, 김모는 5월 20일 선언문, 5월 20일 결의문, 5월 20일 성토문 등 문안작성을 담당하는 일방 당일 진행계획을 토의 결정한 후 1964년 5월 20일 오후 2시경 전시 대학교정에서 약 2천명의 학생을 동원,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결행하고 불법적 가두시위를 감행, 이를 저지하는 경찰관 수백 명에게 상해를 가하고 2백30여만원 상당의 공공기물을 손괴하는 등 전시 황모와 모의한 사항을 실천함으로써 반 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하였고
1964년 6월 3일 김모는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구속학생석방 농성 연좌 단식「데모」를 감행중인 동 교 학생 앞에 나타나 『우리는 서대문형무소로 가야하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같이 투쟁하지 못함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끝까지 극한 투쟁하라, 때는 왔다』하고 선동함으로써 동일 오후 6시경 동 대학교정에서 단식농성 투쟁하던 학생을 선두로 시내 각 대학생 1,500여 명이 동원, 국회의사당과 중앙청을 향하여 현 정권타도 반 보수 친 진보, 반 식민, 반 외압 등의 적색구호를 외치며 불법「데모」를 감행,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세종로 경찰관 파출소 경찰무기고 등을 파괴, 점거 방화하고 군관민 차량을 탈취, 파괴하는 등의 난동을 자행하여 약 450만원 상당의 공공물을 손괴하는 등 전시 황모와의 합의사항을 실행하여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에 동조하였으며.
1965년 7월 31일경 김모는 시내 용산구 후암동 27의 7 약혼녀 손모가에서 현 정권이 한·일 회담을 타결하고 8월 15일까지 국회비준을 강행코자하니 국회를 해산시켜서라도 이를 저지해야한다는 신념 하에 다른 피의자들과 폭음만 크게 나는 폭약을 10여 개 만들어서 동년 8월 6·7·8일경 약 8명의 정예학생을 선발 동원하여 중구 명동 소재 국립극장 앞에 집합시키고 서울특별시청 앞까지 데모를 강행타가 경찰과 대치 중 일제히 사제폭약 10여 개를 투척 폭발케 하고 경찰저지선이 혼란상태에 빠지면 그대로 밀고 나가서 국회를 점거, 해산시켜 한·일 조약비준을 파정케 하라는 등 합헌절차에 의하지 않은 폭력수단으로써 정권전복을 기도하고 북괴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체제하의 변혁을 감행할 것을 음모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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