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기자, 학생 위장해 북 잠입 취재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판문점에서 북한 군인과 기념 촬영을 한 BBC방송의 존 스위니 기자. 그는 런던정경대(LSE) 박사과정 학생 신분으로 위장해 북한에 다녀온 뒤 30분짜리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사진 데일리텔레그래프 웹사이트]

영국의 공영방송 BBC의 기자가 학생으로 신분을 위장해 북한 잠입 취재에 성공했다. 그는 단체 관광에 나선 학생들의 모임에 속한 것처럼 북한 당국을 속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해당 학교는 학생들을 큰 위험에 빠트릴 뻔한 처사라며 BBC에 강력 항의했다. 잠입 취재로 만든 프로그램 방송도 취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언론의 취재 윤리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BBC의 시사 보도 프로그램 ‘파노라마’의 기자 존 스위니는 지난달 23∼30일 북한을 방문했다. 런던정경대(LSE)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 관광단에 포함돼 북한을 둘러봤다. LSE 강사인 부인 토미코 스위니와 촬영 감독 경력이 있는 알렉산더 니아카리스도 스위니와 팀을 이뤄 동행했다. 이들도 신분을 속였다.

 북한에 다녀온 학생들은 영국으로 돌아와서야 존 스위니가 기자임을 알게 됐다. 스위니는 역사학 전공의 박사과정 학생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는 이 학교의 학부를 졸업했지만 박사과정에는 등록한 적이 없다. BBC는 스위니 팀이 제작한 30분 분량의 프로그램을 15일 방송한다고 예고했다. 몰래 촬영한 북한의 모습도 담길 예정이다.

 LSE 관계자는 지난 9일 BBC를 방문해 방송을 내보내지 말 것을 요구했다. 토니 홀 사장에게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스위니의 신분이 북한에서 탄로 났을 경우 학생들 모두가 억류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BBC나 스위니가 사전에 학생들에게 잠입 취재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LSE는 “향후 LSE 학생들이 북한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LSE 교내 신문에 따르면 북한에 다녀온 학생 중에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위협적인 내용의 편지를 받은 학생도 있다.

 BBC는 “학생들에게 사전에 고지했다”고 반박하며 예정대로 방송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생들은 “토미코 스위니가 ‘일행 중에 언론인이 있다’는 얘기는 했지만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위니는 영국 주간지 옵서버에서 1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하다 BBC로 옮겨 파노라마 팀에서 일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얼굴이 꽤 알려진 언론인이다. BBC의 프로그램 홍보 자료에 따르면 그는 북한의 지하철, 혁명 유적지, 공장, 비무장지대 등을 둘러봤다.

스위니는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 후세인의 이라크, 카다피의 리비아 등도 가봤지만 북한은 가장 무서운 독재국가였다”고 방문 소감을 밝혔다. 그는 비무장지대에서 만난 북한 장교에게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가”라고 묻자 “우리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미국에 달렸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나라 정권은 미쳤고, 나쁘고, 멍청하다. 그러나 (국민에 대한) 통제력은 점점 잃고 있다. 그래서 훨씬 더 위험해지고 있다”고 적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