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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잘못, 사소하지 않은 결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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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4일 만난 K교수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금융기관이 일을 어떻게 하는 건가. 내가 이것 때문에 집사람한테 ‘남몰래 수억원씩 돈 꿨다가 가압류나 당하는 거냐’고 부부싸움을 했다.”

 사연은 이랬다. 며칠 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에 사는 K교수 집에 7억4329만원 규모의 채권 가압류 사건 결정문이 담긴 법원 서류가 배달됐다. K교수는 제3 채무자로 기재돼 있었다. 요지는 ‘S금융사에 빚을 진 채무자 P씨가 돈을 안 갚고 있다. 채권을 가압류한다. K씨는 P씨가 제3 채무자인 K씨에게 임대보증금으로 맡긴 돈 가운데 위에 적힌 금액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제3 채무자는 어떤 채권관계의 채무자에게 채무가 있는 제3자를 말한다. 연대보증인과 비슷하다. K교수는 결정문을 받고 무척 놀랐다. P씨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름·아파트는 같았지만 동·호수가 달랐다. 결정문 속 K씨는 K교수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거다.

 잘못된 전달은 S금융사, 동사무소, 법무사 사무소 세 곳 모두의 실수 또는 부주의에서 비롯됐다. 과정을 추적해 보면 간단하다. S금융사 담당자는 진짜 제3 채무자인 K씨에게 결정문이 전달되지 않자, K씨 거주지를 다시 확인해 결정문을 보내는 법원의 명령을 받아냈다. 그리고 법무사 사무소에 진짜 K씨의 주소를 알 수 있는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아 오도록 의뢰했다. 법무사 사무소 직원은 동사무소에 가서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동 ○○○호에 살았던 기록이 있는 K씨를 찾아 초본을 발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동사무소 직원이 전산망을 검색하자 한 명의 K씨가 떴다. 동사무소 직원은 의심 없이 진짜 K씨라 여기고 초본을 떼줬다. 법무사 사무소 직원도 의심 없이 이를 S금융사에 줬다. 이를 바탕으로 K교수에게 결정문이 배달된 것이다. 이때 발급된 초본은 진짜 K씨가 아닌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동·호수가 다른 K교수 것이었다. 물론 법원 결정문과 초본의 동·호수는 달랐다. 세 군데 중 한 곳이라도 제대로 체크했다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이렇게 해명했다. “법원 명령서에 이름·주소만 있었다. 주민등록번호가 있었으면 더 정확히 찾았을 텐데…. 지금 시스템은 해당 구와 도로명 주소를 입력하면 관련 인물이 뜨도록 돼 있다. K씨가 바로 나와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법무사 사무소 직원은 “동사무소 직원을 믿었다”고 했다. S금융사 담당자는 “법무사 사무소 직원을 믿었다”고 했다.

 믿고 일을 맡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믿으면서 직접 확인해야 할 것도 많다. 큰 걸 잘 보는 것 못지않게 작은 일 하나를 소홀히 하면 엉뚱한 사람에게 화(禍)가 미칠 수 있다. 사회지도층인 K교수는 강력한 항의를 통해 신속히 사과를 받아냈다. 하지만 힘없는 서민은 아무 잘못 없이 진술서를 쓰고 사건을 바로잡느라 애를 먹지 않겠는가.

염태정 경제부문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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