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버스를 바꾼 '엄마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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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논설위원

지난가을이었다. 최미경(46·병원 약사)씨는 자신이 회장인 지역모임, ‘함께 가는 강북장애인부모회’에 갔다가 한 회원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회원의 아이는 선불 교통카드를 쓰는데, 가끔씩 잔액이 부족해 버스를 탔다가 내린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걸어온다. 아이의 불편을 어떻게 없애주지. 최씨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 후 석 달. 일부 서울버스 내 요금단말기에서 이런 음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충전이 필요합니다’. 카드 잔액이 2500원 이하일 때 멘트를 날린다. 90여 일 만에 버스가 바뀐 곡절은 이랬다. 최씨는 시청의 아이디어 창구에 충전 알림 서비스를 제안한다.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시 관계자는 생각의 구체화를 부탁한다. 그 과정에서 단말기에 음성메시지를 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서울시 버스정책과 정재은 주무관은 “기술적인 애로가 없어 곧바로 시범운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원로 만화가 이정문옹이 1965년에 그린 만평(하단 그림)을 본다. 서기 2000년대의 이모저모. 태양열주택·휴대전화·무빙워커·원격수업 등 10 여 가지의 미래상이 나온다. 놀랍게도 달나라 수학여행을 빼고 모두 실현됐다. 이옹은 “미래 학자들 생각에 내 생각을 더해 그렸다. 당시에는 황당하다는 평도 받았는데, 언제 봐도 신기하다”고 했다. 지금은 65년과 비교할 수 없는 과학기술 폭발 시대다. 최근 10년간 쌓인 과학기술이 그전 역사의 총합지식보다 많다. 과학기술 강국인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씨처럼 좋은 생각만 있으면 곧바로 기술이 밑받침할 수 있다.

 어느 법구(法句)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고 / 마음에 따라 세상은 만들어진다. 마음은 생각의 지향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생각이고 생각에 따라 거의 모든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시대의 초입에 우리는 서 있다. 창의·상상·융합·창조경제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으리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의 청문회를 계기로 창조경제의 정체를 놓고 불이 붙었다. 뭘 하는 물건이냐는 논쟁이다. 창조경제를 법전·법칙 같은 고체로 보고 뇌 속에 새겨 넣으려다 생긴 소음이다. 이번 논란을 긍정적으로 풀어보자. 시대의 지향이자 메시지 같은 유동체로 보고 좋은 생각이 넘쳐나는 사회·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2006년에 오픈한 서울시 시민 제안 사이트에는 한 해에 10여만 건의 생각이 도착한다. 이 중 100건 이상이 정책에 반영된다. 생활 아이디어가 대부분이다. 그 영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 국가적인 생각 그물망을 짜면 어떨까. 북유럽은 시민창안제도를 바탕으로 고질적인 사회 현안을 해결했다. 우리는 초네트워크 사회이자 과학기술 강국의 이점을 더 살리자.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상품 개발이나 일자리 창출에 단서를 던져주는 생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생각대로 구현되는 세상의 파도에 먼저 올라타자.

 당연히 좋은 생각을 제안한 사람에게는 기분 좋은 대가가 돌아가는 구조를 짜야 한다. 최미경씨는 어땠을까. 사전알림 서비스 생각을 가다듬으려 회원들과 자주 만났고, 다소 부담스러운 경비를 썼다고 한다. 시에서 받은 ‘생각 상금’은 10만원이었다. “거금을 바라고 제안한 건 아니지만 좀 적긴 적었어요.” 최씨가 웃으며 말한다. 이런 인센티브로는 ‘정교한 생각’이 넘쳐나기 어렵다. 시장님, 좀 더 쓰셔야 했던 것 아닐까요.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