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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품고 … 진리 찾아 … 신라 청년들, 배에 몸을 싣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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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24면

웨이하이 인근 스다오에 세워진 거대한 청동 신상과 법화원은 장보고의 인본주의적 행보에 대한 후대의 공감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다. 강동훈 사진작가

영성, 연운, 위해, 일조 등 요일별 여객선의 목적지와 입출항 시간을 보여주던 전광판으로 ‘천안함 46용사를 잊지 말자’는 문장이 지나갔다. 짙은 색상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그 전광판 아래의 출입문을 지나 대합실로 들어섰다. 매표소에는 대여섯 개의 창구가 있었지만, 문을 연 곳은 하나뿐. 일요일이라 출항하는 배는 웨이하이(威海) 로 향하는 평택교동훼리의 ‘그랜드 피스’밖에 없었다. 길이 185.5m, 폭 26.8m에 2만4000t급인 ‘그랜드 피스’호는 오후 6시에 평택항을 떠나 다음 날 오전 9시에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에 도착하는 750명 정원의 정기여객선이다.

실크로드 대장정 ① 황해, 기회와 희망의 바다

3월 24일, 그 배에 오르기 위해 경상북도 실크로드 탐험대와 함께 평택항 국제터미널에서 출국심사를 받다가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출국하는 일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태어나 40여 년을 산 사람치고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어릴 때 들었던 노래 중에는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으로 시작하는 비가도 있었다. 생각하면 그 가사도 이상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제아무리 깊은 바다가 있다 한들 세계 최고의 조선술을 가졌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까 문제는 배가 아니었던 셈.

수출용 자동차가 즐비하게 늘어선 아산만 하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서투른 한국어로 식당에 저녁식사가 준비됐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메뉴는 함박스테이크와 콩나물국. 사다리꼴의 식판에 담긴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배 안을 둘러본 뒤에도 휴대전화의 안테나 표시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지도 앱을 실행시키니 현재 위치라며 당진의 왜목항이 표시됐다. 그러니까 한 시간째 배는 태안반도 연안을 따라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뱃길은 덕적도 인근 해역을 거쳐 황해 먼바다를 건너 중국 산둥반도로 이어진다. 내겐 이 뱃길이 낯설지만, 660년 3월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13만 대군을 이끌고 산둥반도의 성산을 출발한 소정방이 지나온 바로 그 황해 횡단항로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이어주는 이 황해 횡단항로는 전쟁과 살육의 길로 처음 역사에 등장하지만, 드러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천안함 사건을 잊지 말자는 표어 아래로 지나가는 오늘날 황해 상인들의 무심함은 15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치적 격변으로 뱃길이 끊어질 때마다 그들은 온몸으로 배를 밀고 나가며 항로를 이어갔다. 그들에게 이 황해 횡단항로는 기회의 길이었을 테니까. 심청전은 황해 뱃길을 바라보는 선조들의 무의식을 잘 보여준다. 고향 땅에서는 팔려가는 신세일지라도 목숨을 걸고 그 바다를 건너가면 새로운 삶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

고려 태조 왕건 부친, 작제건 설화의 무대
이런 변신, 혹은 신분상승의 희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설화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과 관련한 이야기다. 보육이라는 이의 둘째딸이 진의인데, 어느 날 언니가 오관산에서 오줌을 눠 천하를 잠기게 하는 꿈을 꾼 것을 알고 비단 치마로 그 꿈을 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당나라 황제가 보육의 집에 묵게 되는데, 언니가 코피 때문에 그의 찢어진 옷을 깁지 못하자 진의가 대신해서 바느질을 한 게 인연이 돼 둘은 동침한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이라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작제건이 장성한 다음 아버지를 찾아 신물인 신궁을 가지고 당나라 상선을 탔다.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점을 치니 고려인을 섬에 내려놓으라 하였다.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은 서해 용왕인데 늙은 여우가 나타나 경을 외우면 두통을 일으키니 쏘아달라는 것이었다. 약속한 대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니 용왕은 용궁으로 초청하였고, 용녀를 아내로 삼아 칠보와 양장 및 돼지를 얻어 돌아왔다.”

다들 짐작하다시피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유신의 누이동생들인 문희와 보희의 매몽설화(買夢說話)와 유사하다. 새로운 왕조를 개국한 왕건으로서는 자신의 가계를 신비롭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설화를 지었으리라.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는 심청전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그건 아비도 모르는 아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외국 상선에 올라타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게 돼 있다. 작제건 설화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당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는 신라의 젊은이들이 많았다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런 젊은이 중 하나가 바로 장보고다.

장보고 이야기에는 그 시절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창작한 설화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궁복 혹은 궁파, 즉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지칭하니 이는 곧 이름조차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바다 건너 당나라로 들어가 무공을 세우고 무령군 군중소장직에 오르기까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해적에게 납치돼 이국에서 팔려나가는 동포를 보는 그의 심정이 또 어땠을지도 이해된다. 해적들을 소탕해 바다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청해진이란 그런 강력한 공감의 토대 위에 건설됐으리라. 이 인본주의적 공감의 깊이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해서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海禁·쇄국의 귀결은 임진왜란과 경술국치
이틀 뒤, 실크로드 탐험대가 도착한 웨이하이 시 인근 스다오(石島)의 적산(赤山) 법화원에서 이 공감의 조형적 크기랄까, 건축학적 웅장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820년대 초 장보고가 설립한 신라 승원 법화원이 있어 재당(在唐)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 적산 그룹이 옛 법화원을 재현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스다오 항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적산명신(赤山明神)의 동상이다. 높이가 50여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신상은 생김새부터가 우락부락한 것이 장군 얼굴인데, 황해를 지그시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아래쪽을 누르고 있다. 바다의 풍랑을 막아주는 바다의 신이기 때문이다. 거기 사람들은 적산명신이 중국 본래의 바다신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게 일본 천태종의 제3대 좌주인 엔닌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다. 그 책에서 엔닌은 재당 신라인 사회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찾을 수 있다.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에서 무사히 구법활동을 마칠 수 있었다.” “장보고에게 은혜 입은 것은 마치 태산과 같으며, 그 은덕의 깊이는 형용할 바를 모른다.” 일본으로 돌아간 엔닌은 죽으면서 교토에 적산선원을 세우고 적산대명신을 모시라는 유언을 남겼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구절들과 연결해서 이 적산대명신을 장보고로 여기는 견해도 있고, 일본의 다른 신사에서도 발견되는 신라명신과 연결해서 장보고의 법화원이 모시던 신라명신을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장보고의 법화원이 한·중·일 동북아 3개국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지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활을 잘 쏘던 완도 출신의 아이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가서 바다의 지배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그 어떤 설화보다도 매력적이다. 이 변신담, 혹은 성장담은 하층 계급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장보고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 바로 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이다. 소정방의 대군이 서해를 횡단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항해 정보를 제공한 김인문이 그 뱃길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김인문은 생애를 통틀어 일곱 번 당에 들어가 총 35년을 머물렀으며 신라와 당을 오가는 길 위에서만 3년6개월을 보낸 사람이자, 그와 마찬가지로 횡단항로를 건너간 뒤 다시는 신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신라의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그들이 풍운의 꿈을 안고, 혹은 진리를 구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건너간 그 바닷길이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통일신라의 등장도 없었을 테지만, 뒤이어 그 항로를 거쳐간 최치원도 혜초도 원광법사도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문학서랄 수 있는 『계원필경』도, 인류의 유산인 『왕오천축국전』도, 세속오계도 나올 수 없었으리라.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그 모든 유산이 사라진 역사적 풍경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1273년 여몽(麗蒙)연합군의 공격으로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 잔존세력이 제주에서 패퇴하고 섬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한 이후의 한국사는 어쩌면 그 가정의 역사가 실현된 결과일지도 모르니까.

섬을 비운다는 것은 바다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를 정책적으로 표현하면 ‘해금(海禁)’, 즉 ‘쇄국’이 된다. 해금과 쇄국의 역사적인 귀결은 임진왜란과 경술국치가 되리라. 그 역사적 치욕으로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비통하기 짝이 없지만, 그와 더불어 조선시대에도 충분히 나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최치원과 또 다른 혜초가, 또 다른 『계원필경』과 또 다른 『왕오천축국전』이 그렇게 해서 아예 나올 수 없게 됐다는 점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 또한 그건 비천하게 태어난 한 아이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가서 왕이나 왕비가 됐다는 희망의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배가 아니라 그런 변신과 성장의 이야기들이 사라진 쇄국의 역사인 셈이다. 그러므로 오늘 황해를 건너간다는 건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 속으로 담대하게 발을 내딛는 첫걸음이리라. 그리고 이 첫걸음은 바다를 건넌 뒤에는 진리를 좇아 장안(長安)과 그 너머의 서역 땅까지 이른 구법승들의 머나먼 길, 실크로드로 이어진다.



김연수 요즘 뜨는 작가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꾿빠이, 이상』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했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 싣는 순서
1 황해, 기회와 희망의 바다
2 진리를 찾아 서쪽으로
3 장안, 새로운 여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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