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재정 절벽’보다 솔직한 고백이 우선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과 이석준 기획재정부 2차관이 어제 “이대로 가면 하반기에 ‘재정절벽’을 맞을 수 있다”며 ‘12조원+α’의 추경예산 편성을 기정사실화했다. 그 재원을 적자 국채 발행으로 마련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되짚어 보면 정부가 그제 올 성장률 전망치를 2.3%로 확 끌어내린 것이나,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례적으로 실명 브리핑에 나선 것도 적자 국채 발행을 위한 명분 쌓기용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 청와대가 “이명박 정부가 재정균형을 억지로 맞추려고 했던 게 문제”라며 추경 편성 원인을 떠넘긴 것도 책임소재를 희석시키려는 물타기 포석이 아닌가 싶다.

 적자 국채를 발행해 세수 구멍을 메우고 경기를 부양시키는 것은 너무 손쉬운 일이다. 이를 위해 ‘재정절벽’ 운운하며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추경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다. 물론 국가재정법상 추경을 편성하기 위한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나 천재지변, 대량 실업에 직면한 위기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7분기 연속 ‘제로 성장’에서 탈피하고, 늘어난 복지 비용을 감당하려면 추경 편성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1%가 넘는 사상 둘째 규모의 적자 국채를 발행하겠다면, 정부는 그 다음 해법도 내놓아야 한다. 앞으로 재정 건전성을 어떻게 회복시킬지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가 증세에 난색을 표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경기가 안 좋을 때 세금을 올리면 경기가 더 침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적자 국채 발행에만 기댈 수 없다. 오히려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박근혜 정부의 복지공약을 이행하려면 매년 27조원이 더 필요하다. 올해는 12조원의 적자 국채로 땜질한다고 쳐도,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청와대와 재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도 가능하다’는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마다 ‘재정절벽’ 위협과 적자 국채 발행이 연례행사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재정은 망가지게 된다.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대선 과정에서 빚어진 복지 거품을 걷어내고 우선순위를 과감히 조정하는 일이다. 불요불급한 정부 세출도 확 줄이는 성의를 보인 뒤에 적자 국채를 발행해도 늦지 않다. 2017년까지 최소한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어떻게 짤지도 고민해야 한다. 장기 저성장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증세마저 어렵다면 135조원 규모의 ‘박근혜표’ 복지공약 이행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금 정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 현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꾸준히 국민들을 설득해 복지 기대 수요를 낮추거나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증세까지 각오해야 한다. 이 모두가 용감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조 경제수석은 “눈에 훤히 보이는 세수 부족을 그대로 두면 ‘재정절벽’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로 눈에 빤히 보이는 대규모 적자 국채 발행이 누적되면 한국판(版) 그리스식 재정위기가 일어나는 것도 시간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