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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신> - 사이공 서제숙 기자|전장과 여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창밖의 운해는 강렬한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있었다. 때때로 구름 사이에 펼쳐지는 남지나해는 무거운 침묵처럼 깔려있었고 기내의 손님들도 말없이 조용했다. 「홍콩」발 「사이공」행「제트」여객기. 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구름바다를 내다보며 출발과 도착의 흥분과 불안을 되새기는 기자에게 옆자리의 미군 소령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서 오셨습니까.「사이공」엔 왜 가는가요?』취재 차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삐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타이거·디비전(맹호 부대)에도「핑크」색 야전변소를 만들어야겠군요.』 처음 어리둥절하던 나는 이내 그의 말귀를 알아 차렸다. 【사이공=서제숙기자】
월남 종군기자 중에는 여 기자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이들을 위해 「다낭」인가 어느 미군기지에는「핑크」색으로 된 여자 전용변소를 지었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암탉이 무슨…』동행 미군 농담도>
『암탉이 무슨 싸움터엘…』미군소령이 웃는 얼굴속에는 이런 뜻이 숨은 듯 했고 서울 출발 전 비행기편을 주선 할 때 받은 같은 느낌이 겹쳐 .나는 약간 비위가 상했다. 전쟁의 피해와 상혼은 누가 더 입고있는가. 전쟁은 연인들에게 무엇을 안겨주고 있는가. 불끈 가슴속에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비행기는 벌써 월남 상공을 날고 있었다. 기상에서 내려다보기에는 아름다운 자연 그뿐이다. 폭격이나 포연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끝없이 이어지는 수해...
고무 밭과 야자수가 점점이 보이는 고원 지대를 지나 뱀의 꼬리처럼 강줄기가 나타났다. 「고·딘·디엠」정권 때 시도한 전략 촌 인 듯, 강을 낀 언덕과 계곡에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길과 아담한 집들의 마을이 띄엄띄엄 보였다.
드디어 야자나무 숲속에 싸인 큰 도시가 나타났다. 「사이공」이다. 한때는 동양의 진주였던 「사이공」.
냉방된 비행기에서 내리자 찌는 듯한 열기가 온몸에 감싸였다. 「사이공」교외「탄손 루트」공항.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활주로를 따라 작열하는 햇빛아래 열지어 있는 군용기. 긴박감이 더위와 함께 스며왔다.

<스며드는 긴박감 번쩍이는 군용기>
비행장에서 시가로 오는 길은 조용했다. 월남의 유명한 「시에스타」·온도시가 낮잠에 잠긴 것이다. 백열의 햇빛만이 길 위에 반사되고 「다미린」의 여윈 가로수가 뜨거운 햇빛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주택가 흰벽과 담장에 핏빛으로 피여 있는 화염수꽃들과 완상용 파초잎….
바로 오늘 아침 8시에 「사이공」시 중심가에 있는 주월 미군 사령부를 향해 「베트콩」이 쏜 박격 포탄이 마침 앞을 달리던 정부군「트럭」에 명중해서 9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거리를 지났다.
「사이공」의 2월은 겨울인 셈이지만 가만히 있어도 등뒤에 축축히 땀이 스며들었다. 밤중보다도 더 「심야」같던 거리는 3시에 다시 깨어났다.

<도보로 「택시」로 전진 행렬과 합류>
나는 백주 심야의 거리와 깨어난 하오의 번잡을 이룬 거리를 잊은 물건을 찾듯이 돌아다녔다. 대사관 차로 「택시」로, 도보로....
큰 행길에는 군용「트럭」과 「델타」지방에서 들어온 것인가 먼지투성이의 짐차 자전거 「스쿠터」「사이크로·택시」등이 열기와 먼지와 온 도시에 넘쳐흐르는 찝찔한 냄새 속을 달려가고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마다 쌓여있는 쓰레기의 무더기, 모든 것이 썩고있는 냄새를 풍긴다. 때때로 저공비행의 폭음이 귀를 때리는데 골목 어귀에는 맨발의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여대생 차림의 여인이 동승한 군용 「지프」가 질주하고 공주처럼 차린 여인을 모신 까만「캐드랙」이 미끄러지듯 조용히「로터리」를 돌아갔다.
키의 절반도 차지 않는 「베트남」여인을 끼고 미국병정들이 거리를 걷고있었다. 「검」을 씹거나 큰소리로 지꺼리지도 않았다. 꽃잎처럼 보드랍고. 아름다운 살결과 가냘픈 몸매…. 여인이라기보다 모두 딸들의 표정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한낮부터 컴컴한 「바」에는 미군이 들이차있고 문밖에는 월남정부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집에 보초는 월남군인>
윌남은 분명히 「아시아」인데 월남전은 이미 「아시아」전쟁이 아닌 모양인가.
해가 지고 열기가 고개를 숙이는 밤에 멀고 먼 남쪽 끝까지 왔다는 느낌을 안고 「사이공」의 명동 「투토」(자유)가를 걸었다.
자극적인 「네온사인」에 「나이트클럽」과 「바」가 숲을 이룬 거리… 여윈 월남 사나이가 「네온」불빛에 비쳐 유령처럼 앉아있다. 길을 안내하던 L기자는 나의 지나친 욕심에 지친 때문일까. 자꾸만 『무엇 때문에 월남엘 왔느냐』고 되풀이 반문한다.
이제는 잊혀진 옛일처럼 아련해진 어느날의 부산거리를 다시 보는 듯 무거운 우울이 가슴에 차면서도 일종의 의무감 같은것을 느꼈다.
역사상 가장 좌절감에 부딪친 전경. 그것이 바로 내가 겪고 나의 조국이 겪었던 그런 전쟁에서 병사들의 영웅적인 전투가 아니라 월남의 여성들과 아이들 그리고 평범한 민중들이 전쟁과 함께 어떻게 살고 느끼고 변하고 있는가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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