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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36> 경기도 여주 여강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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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강길 1구간 중 은모래금모래강변은 길이 잘 나 있어 걷기에 편리하다. 강변사찰 신륵사와 여강을 오갔던 황포돛배도 볼 수 있어 걷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강원도 태백시 대덕산에서 발원해 충주~여주~양평~서울로 흘러가는 강이 남한강이다. 그런데 여주 사람들은 이를 여강(驪江)이라고 부른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그냥 여주에 있어서다.

그 옛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강 양옆으로 마을이 생겼고, 이를 이어주기 위해 나루터가 만들어졌다. 이 마을과 마을, 나루와 나루를 잇던 옛길들을 연결해서 만든 것이 여강길이다. 여강길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강변 사찰 신륵사가 있고, 세도가들이 풍류를 즐겼던 부라우 바위도 있다. 수달이 살고,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종인 층층둥글레와 단양쑥부쟁이가 산다.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가 남한강 물길만큼 풍성하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여강길을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한 이유다. 총 53㎞ 중 여주터미널부터 도리마을회관까지 1구간을 걸었다. 다른 구간보다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글=이석희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2 부라우 나루터 인근에 있는 부라우 바위. 단암 민진원이 새겼다는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3 아홉사리 과거길은 산속에 나 있는 오솔길이다. 4 흔암리 나루터를 지키고 있는 포플러나무. 나루터 흔적은 1972년 홍수 때 모두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한다. 5 달을 맞이했다는 영월루.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이어주던 나루터 길

걷기 여행을 다니다 보면 두 개의 길을 만난다. 인공적인 길과 자연적인 길이다. 인공적인 길은 걷기는 편하지만 걷는 재미는 없다. 자연적인 길은 힘은 다소 들지만 걷는 맛이 좋다. 여강길 1구간(16.5㎞)은 이 두 길이 잘 어우러져 있다.

여강길 시작점은 여주 터미널이다. 달을 맞이했다는 영월루를 지나 은모래금모래 강변~한강문화관~강천보로 이어지는 2㎞ 남짓한 구간은 인공적인 길이다. 4대강 사업을 하면서 강둑을 정비한 덕분에 길이 잘 나 있다. 봄 내음 가득 묻은 강바람을 맞으면서 신륵사의 전경도 감상할 수 있고, 그 옛날 여강을 왕래했던 황포돛배도 볼 수 있다. 4대강 사업으로 생긴 강천보의 야경도 구경거리다.

강천보를 지나면 자연적인 길이 나온다. 남한강을 바라보면서 논둑길도 걷고, 야트막한 산속 오솔길도 걷는다.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이 여전히 쌓여 있어 푹신한 느낌이 발바닥을 통해서 전해 온다. 이런 길이 아홉사리 과거길까지 이어진다. 최대한 데크로드를 깔지 않고 옛날 흙길을 그대로 남겨놓아서 좋다.

“옛길을 찾기 위해 겨울에도 산속을 참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길을 찾다 보니 신기하게도 고라니 발자국이 많이 찍혀 있는 곳이 전부 옛날 길이었습니다. 고라니가 다녔던 길이 바로 옛날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었지요.” 안내를 맡은 박희진(41) 사단법인 여강길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박 국장은 2004년 이 길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여강길과 함께 하고 있다.

강천보에서 10여 분 걸으니 부라우 나루터다. 1구간의 별칭이 ‘옛나루터길’인데 그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부라우 나루터를 시작으로 약 7㎞에 이르는 길에 우만리 나루터, 흔암리 나루터가 있다. 주민들이 여주장을 보러 가거나 강 건너 마을을 왕래하기 위해 이용한 나루들이다. 충주 등 남한강 상류에서 한양으로 가던 물자를 실어 나르던 배가 드나들기도 했다.

부라우는 ‘붉다’의 우리말인데 주변에 붉은 너럭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붉은 바위에는 단암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호가 단암(丹巖)인 인현왕후(조선 19대 숙종의 계비)의 오빠 민진원(1664~1736)이 새긴 것이다. 인근의 여흥 민씨 집성촌에 살던 단암은 자주 이 바위를 찾았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풍류를 즐기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부라우 나루터를 지나면 논둑길과 산길이 이어진다. 야트막한 산길을 한 시간 가량 따라가면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강가에 서 있다. 우만리 나루터다. 300년은 족히 넘었다고 한다.

“옛날 나루에는 이 느티나무처럼 큰 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다고 합니다. 사공이 멀리서 보고 나루라는 걸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등대나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 거죠.”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흔암리 나루터까지는 3.8㎞를 더 가야 한다.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 밑을 지나 올라오면 전원 주택단지가 나온다. 강변을 따라 걷던 길이 주택 단지에 가로 막혔다. 주택 단지를 끼고 오른쪽으로 길게 돌아가니 다시 산길이다. 흔암리 나루터까지 꽤 긴 산길이 이어지지만 폭도 넓고 완만해 그리 힘은 들지 않는다.

흔암리 나루터 인근은 전부 밭으로 변했다. 여강길 이정표만이 흔암리 나루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1972년 대홍수 때 나루터 흔적이 모조리 휩쓸려 갔다고 한다.

청운의 꿈 품고 넘었던 아홉사리 과거길

흔암리 나루터를 지나면 1㎞ 정도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동네를 관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리치빌 청소년 수련원에서 다시 흙길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아홉사리 과거길이다. 여강길 전체 구간 중 가장 난 코스라고 할 수 있다. 3㎞ 남짓한 길이지만 이름 그대로 아홉구비를 돌고 돌아 가야 한다. 아직 산속 바람에는 찬 기운이 묻어왔지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만큼 힘든 코스다.

‘아홉사리 과거길’. 이름이 참 재미있다. ‘아홉 개의 산이 마치 국수를 삶아 말아 놓은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경상도나 충청도를 떠나온 유생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도 있다. 음력 9월9일 9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달여 마시면 모든 병이 나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아홉사리 과거길을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져 온다.

대부분의 길이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다. 산속 깊이 들어앉아 있어 남한강이 보이지 않는 구간도 많다. 오른 만큼 내려와야 하고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야 한다. 아홉 번이나 오르락 내리락 해야 겨우 벗어날 수 있다.

잔설도 남아 있어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한눈 팔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 아홉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굴러야 할 정도로 깊은 곳도 있다. 여강길 중 유일하게 길 옆에 추락 방지용 밧줄을 쳐놓은 이유다. 그 옛날에는 들짐승도 심심찮게 나왔을 것만 같다.

이 고갯길을 넘으면서 유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갯길이지만 청운의 꿈,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그래도 어렵지 않게 넘지 않았을까요?”라고 하자 박 국장도 고개를 끄떡였다.

“이 길을 이용한 유생들은 대부분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배삯이라도 아껴야 했지요. 노잣돈이 풍부한 유생은 대개 충주~여주~양평~팔당~광나루~마포를 오갔던 배를 타고 한양으로 들어갔지요. 당시 남한강은 지금의 고속도로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빨리, 편안하게 한양으로 갈 수 있는 물길이었지요.”

한양으로 갈 때는 큰 꿈을 가졌겠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때의 이 길은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급제를 한 몇몇에게는 마치 탄탄대로 같이 느껴졌을 터이다. 하지만 낙방한 유생들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남한강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왠지 수많은 선비의 눈물이 이 길 속에 스며있을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박 국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아홉 번째 고갯길이다. 아홉사리 과거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어서 나무 의자도 마련해 놓았다. 소나무 사이로 남한강과 강천섬, 도리 늘향골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힘든 길을 걸어왔기에 강바람이 시원하고 달콤하다. 고단함을 한꺼번에 씻어내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길정보=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으로 나와 3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10여 분 가면 여주 터미널이 나온다. 여강길 출발지다. 여강길은 여주군에서 조성했지만 충북 충주시와 강원도 원주시에도 살짝 살짝 걸쳐 있다. 전체는 3개 구간 약 53㎞다. 1구간(16.5㎞)은 여주 터미널에서 도리마을회관까지로 ‘옛나루터길’로 부른다. 2구간(20㎞)은 ‘세물머리길’로 남한강교를 건너 충주시와 원주시를 거쳐 다시 여주로 돌아와 강천교회에서 끝난다. 3구간(16.5㎞)은 ‘바위늪구비길’이다. 강천교회에서 신륵사까지 이어진다. 코스마다 7~8시간쯤 걸어야 한다. 3구간은 예전에는 남한강변을 따라 우거진 갈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걷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없다. 남한강물이 넘나들면서 늪이 된 바위늪구비도 옛 모습을 잃었다. 멸종위기식물인 단양쑥부쟁이가 살았지만 지금은 모두 강천섬으로 옮겨졌다. 여주군과 여강길 사무국은 4구간을 조성해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여주터미널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효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을 돌아오는 약 15㎞ 길이다. 여강길사무국(rivertrail.net) 031-884-9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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