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장·펑 싸잡아 비난 … “文武 연합 군사구락부 조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3호 33면

1953년 7월 28일 오전 9시, 한국전쟁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펑더화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의 지지를 받는 경우가 있다. 1959년 8월, 여산회의가 끝날 무렵 외교부 부부장 장원텐(張聞天·장문천),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황극성), 후난(湖南)성 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주소주) 등이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와 함께 몰락했다. 황커청은 펑더화이의 오랜 측근이었고, 저우샤오저우는 마오쩌둥의 비서 시절부터 펑더화이를 잘 따랐다. 동향이기도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2>

 장원텐은 경우가 달랐다. 학자와 문인들을 줄줄이 배출한 장쑤(江蘇)성 우시(無錫) 출신으로 학생 시절엔 창작과 외국문학에 심취한 문학청년이었다. 일본과 미국·소련 유학을 거친 후 혁명의 한복판에 뛰어들었지만 총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펑더화이와는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단둘이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성격도 판이했다. 펑더화이는 급하고 표현도 거칠었다.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하급 부하와 애들에게만 인자했다.

 장원텐은 사람 됨됨이가 겸손했다. 1935년 1월부터 3년간 중공의 최고지도자였지만 무슨 일이건 멋대로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한 사람이 돌출행동을 하는 조직은 활력이 없다”며 집단지도체제를 견지했다.

1976년 봄, 고향 우시에서 부인과 함께 꽃구경 나온 장원텐.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 북부 준이(遵義)에서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당권과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돼버렸지만, 전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마오쩌둥은 장원텐을 정점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의 한 사람이었다. “총서기가 공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여기는 당원들이 많다. 원인은 단 하나, 장원텐 동지의 겸손 때문이다. 1935년 1월, 준이에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사상이나 이론 면에서 당의 책임자로 장원텐 동지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총서기에 선출됐지만 재삼 사양했다. 마오쩌둥 동지가 정 그렇다면 군대는 내가 맡겠다고 스스로 나서자 수락했다. 마오쩌둥 동지가 군사문제를 전담할 3인 소조를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장원텐은 마오쩌둥을 신뢰했다. 훗날 본인은 부인했지만, 마오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그간 우리 당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느라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가 있어야 장정을 승리로 이끌고,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런 장원텐을 마오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뭐든지 첫째, 둘째, 셋째 하며 조목조목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들을 때는 그럴듯하지만, 남는 게 하나도 없다. 시골 중학교 선생이나 하면 알맞을 사람이 혁명에 뛰어든 것이 대견하다. 미국 경험도 있고 하니 훗날 국제 무대에 나가면 합리적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을 사람이다”

 마오쩌둥의 말대로 장원텐은 지식을 중요시하고 인재를 존중했다. 부패한 사람을 보면 부모 죽인 원수처럼 대했다고 한다. 단, 아무리 태평성세라도 중국에 적합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전쟁시대였다.

 신중국 수립 후 장원텐은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소련 주재 대사와 제네바회담 대표를 거치며 국제무대를 누볐다. 1959년 7월, 여산회의 무렵에는 외교부 상무부부장으로 중국 외교를 전담하고 있었다.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의견서를 놓고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됐다. 펑더화이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거의가 동조하는 눈치였다. 7월 21일 장원텐의 발언이 시작되자 다들 숨을 죽였다.

 장원텐은 자타가 인정하는 이론가다웠다. 발언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회의 개막 20일 만에 가장 엄숙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산 위에서 오랫동안 회의를 연 적은 유사 이래 없었다”고 입을 뗀 후 무려 3시간 동안 대약진 운동의 성과와 결점을 체계적으로 나열했다. 펑더화이의 의견과 거의 일치했다. 발언 내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그놈에 첫째, 둘째, 셋째 또 시작했다”며 “흥” 하고 코를 확 풀어버렸다.

 그날 밤, 바람 쐬러 나온 장원텐은 산책 중인 펑더화이를 발견하자 먼저 다가갔다. “네 주장이 맞다. 오늘 너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펑더화이는 “지원 같은 건 필요 없다”며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그래도 궁금했던지 헤어질 무렵 발언 내용을 물었다.

 펑더화이는 자신의 주장이 장원텐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았다. 마오로부터 문무(文武)가 연합해 “군사구락부”를 조직했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