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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그래서 야당이라도 양보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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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논설위원

“요즘 PP로 불린다며.” 여권 중진이 일주일 전쯤 정부조직법 난국을 걱정하다가 던진 말이다. “PP?”라고 되묻자 그는 “프레지던트 박(President Park). 여느 정치지도자들은 이름의 영문 이니셜로 불렸잖아. YS·DJ·JP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만은 사석에서도 이름을 못 부르고 PP라고 했지. 요즘 여의도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PP라고 하대”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동시에 팽팽한 뭔가도 있었다. 오늘의 PP에 예전의 PP가 중첩된 탓일까. 그러나 그는 박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과 달리 국회와 타협해야지 일방적으로 해서도, 일방적으로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국회선진화법이라면 박 대통령도 지난해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찬성했던 ‘개혁’ 조치 아닌가. 그로부터 일주일, 생각이 달라졌다. 박 대통령의 일련의 강수(强數)를 보고서다.

 우선 청와대 국가안보실 건이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이 정부조직법상 신설 조직이라며 법 처리 지연으로 안보 공백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신설이라기보다 확대 승격이라고 해야 옳다. 수석급 국가위기관리실을 장관급 안보실로 바꾸고 2 비서관 체제를 3 비서관 체제로 늘린 거니까 말이다. 추가된 비서관도 외교안보수석실에 있던 게 이동했다고 보는 게 맞다(대외전략→국제협력). 기존의 두 비서관은 유임되기까지 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급한 대로 대통령실장으로, 경호실장을 경호처장으로, 국무총리실장을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하게 했듯 안보실장도 위기관리실장으로 임명장을 주면 될 일이었다.

 국무회의만 한 번 열었다면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정부조직법 사항이 아니냐고? 장관급만 아니면 가능했다. 대통령령(대통령실과 그 소속 기관 직제)에 ‘국가안보실장’이란 여섯 글자만 넣으면 됐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 개정안을 의결하면 끝이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도 이런 프로세스를 알았을 거다. 그런데도 ‘민간인 김장수’가 안보를 다루도록 했다. 장차 임명될 사람이라고 하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선택을 한 셈이다.

 국무위원들 건도 기묘하다. 청와대는 정부조직법이 통과돼야 일괄 임명하겠다는 방침이라고 했다.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돼 언제든 발령낼 수 있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급기야 ‘장관 예정자’란 초유의 표현까지 등장했다.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두 번 주는 사태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조직법이 발효되기 위해선 국무회의에서 공포안부터 의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엔 별 수 없이 ‘행정안전부 장관 유정복’인 게다.

 4일 대국민 담화에 이르는 정치 과정도 강했다. 대통령이 생중계되는 동안 화낸 건 이례적이었다. 야당에 회동을 제의하고 회동키로 했다고 발표한 것도 생소했다. 논란을 종결짓는 용이었던 대국민 담화나 대통령과 여야 대표 회동이 논란 도중 동원된 것도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국정 난맥상은 대통령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국정 최고책임자로선 주저할 법한 ‘계책’들을 한꺼번에 쓴 격이니 말이다. 이는 역으로 그만큼 박 대통령의 정부 조직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방송통신에 대한 야당 주장을 들어주면) 굳이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할 정도 아닌가. 행정부는 대통령의 뜻대로 구성돼야 한다는 원칙까지 감안하면 박 대통령이 물러날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 양보해야 한다. 여당은 무기력하다. 남은 건 야당뿐이다. “결국 국정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이란 생각으로 눈 한 번 질끈 감아야 한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한 번 더 감아야 한다. ‘발목잡기’ 잘못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대승적으로 결단할 때다. 국민 된 입장에서 영 불안해서 하는 말이다.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