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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공허한 관청용어 사라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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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재작년 이맘때 작고한 이석제(1925~2011) 전 감사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도의 용인술(用人術)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능력과 청렴성 면에서 요즘도 그만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5남매를 키우느라 허덕이면서도 권세를 이용하거나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았고, 말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그는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에서 시작해 총무처 장관, 감사원장으로 오래 재직했다. 총무처 장관 시절 공무원 정원·승진·공채·연금 제도를 확립해 우리나라 관료제의 기틀을 다졌다.

 이 전 감사원장을 타계하기 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1961년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임명받고 나서 처음엔 부족한 법지식을 걱정했다고 한다. 자신이 대구대(영남대의 전신)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고등고시를 준비했던 경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일을 맡고 보니 법학 실력은 나중 문제였다. 우리말 헌법 하나 만들어놓았을 뿐, 나머지 하위법령들은 거의 일본어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국회가 정쟁에 몰두하느라 정부 수립 후 13년이 지나도록 방치한 탓에 일선기관들이 옛 조선총독부령에 의지하고 있더라는 얘기다. 이씨는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일종의 죄악을 범한 것”이라고 말했다. 각 부처에 법제관을 새로 두어 우리말 법령으로 뜯어고치는 데 2년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어로 씌었다 해서 다 같은 우리말인 것도 아니다. 어색한 말, 비문(非文), 일본식 용어, 외래어 남발 등 법률·행정용어는 지금도 손볼 곳투성이다. 공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이고 공허한 ‘관료 언어’도 여전하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을 지낸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관료 언어의 특징을 이렇게 꼬집는다. “문장이 길다. 명사와 명사를 연결하고 조사를 잘 쓰지 않는다. ‘특단의 조치’ ‘활성화’ ‘강력한 대책’처럼 강한 톤의 명사와 부사를 자주 쓴다.” 김 교수는 인사위원장 시절 ‘과감하게 혁신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같은 문장이 올라오면 ‘혁신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는 식으로 고치곤 했다.

 신임 정홍원 국무총리도 용어 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총리 취임사를 준비하면서 총리실 간부들에게 “문장은 가급적 짧게 다듬고, 형용사·부사를 절제해 메시지를 분명히 하라”고 주문했다 한다. ‘그러나’ ‘하지만’ 같은 접속부사는 되도록 쓰지 말라고 했단다. 관청 보고서에 흔히 등장하는 ‘차질 없이’ ‘원만히’ ‘범정부적 대처’ 같은 상투어도 정 총리의 기피 대상이다. 용어에도 인플레이션 효과가 있어서 ‘특단’이 잦아지면 갈수록 특별함을 잃고, ‘활성화’가 흔해지면 점점 활기가 죽는 법이다. 총리실에서부터 정부의 말이 바로 서기 시작하면 좋겠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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