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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씻은 눈으로 태양을 보라

중앙일보

입력

세계라는 거대한 발전기가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계와의 접속을 통해 각자의 삶을 영위하게 마련이다. 그 동력은 최초에 태양이었고, 아직까지도 그것은 유효하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기계문명 시대의 도래와 함께 태양의 발전능력이 상당부분 감소했다. 태양이 죽은 게 아니라, 태양빛의 효용성이 극미해진 것이다. 세계는 이제, 인간의 자의에 의해 탄생한 기계들의 천국이다. 태양은 이미 산송장이 돼버린 걸까.

플러그에 감전된 세계
작금의 세계는 기계에 의해, 기계를 위해 움직이며 인간의 본원적 능력들을 감퇴시킨다. 세계 속에서 일탈하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세계의 질서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누구든 복잡하게 얽힌 전선 플러그들의 연결망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만약에 그것을 거부한다면?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숙명적 궤멸만 있는 것일까?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김연수 옮김. 나무심는사람)은 스스로 플러그를 뽑고 기계문명의 관성에서부터 발을 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탈락자들의 울분이나 하소연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참된 삶을 탐색하는 자들이다. 자동차 면허증을 반납하고, 손수 옷을 지어 입거나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 현대의 원시인들은 전원 플러그에 감전된 일상을 싱그러운 태양볕에 말려 자연과 상생하는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속세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현실도피자들인가. 이런 오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아미쉬들의 잡지 『플레인』의 발행인이자 이 책을 엮기도 한 스코트 새비지는 이렇게 말한다.

“(전략)…소박하게 살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이나 장소, 물건의 지극히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다시 배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다른 이들과 연결되지 않는 소박한 삶이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23쪽)

일테면 이들은 단순히 개인적 삶의 평안과 단순성만을 보장받기 위해 자연 속에 숨어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기계문명이 매장시키고 오도해 버린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잡지 『플레인』은 그런 의미에서 기계문명 속에 사장되다시피 한 사람들의 풋풋한 정서를 컴퓨터가 아닌 활자와 목판화를 통해 되살려낸다. 스스로 키운 곡물들을 나눠 먹으며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온정과 배려가 거기에는 물씬 배어있다.

곡차를 마시며 진솔한 대화를…
이 책을 읽고 나면 한 잔의 은은한 곡차를 마신 듯한 개운함이 느껴진다. 기계의 녹물에 찌들인 일상이 산뜻하게 헹궈지면서 여태껏 놓치고 있던 삶의 중요한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만 보고 내달리던 삶의 사사로운 디테일들을 차근차근 둘러보는 시야가 생긴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교수의 추천글과 옮긴이 김연수씨의 친절한 안내가 앞뒤로 놓여 자칫 먼 나라의 생경한 이국풍경들로만 여겨질 수도 있을 내용들을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의 문제와 즉시에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건 늘상 활력과 생기를 공급하고 있으면서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잊혀져버리는 머리 위의 태양을 투명하게 살균된 시선으로 새삼 돌아보는 일이다. 거기에는 모든 인간의 본원적 생명이 맑고 뜨겁게 발산하고 있다. (강정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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