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후세인에 시간 더 줄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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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라크에 대한 무기사찰 시한을 연장하는 것은 나쁜 영화를 재상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런 영화를 다시 보는 데 관심이 없다. " 오는 27일로 예정된 사찰 시한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1일 유엔 무기사찰단의 대 이라크 사찰 연장 요구를 일축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겐 이미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지만 이제 그 시간이 다하고 있다"고 말하고, "후세인이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냐"고 반문했다.

그는 "미국의 친구들은 과거 후세인의 시간끌기와 기만전술을 몸소 체험하지 않았느냐"며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고 있는 프랑스.독일 등 동맹국들을 힐난하고, "미국은 이라크의 무장해제를 위해 필요하다면 '자발적인 의지의 동맹'을 이끌 것"이라고 말해 영국 등 극소수 동맹국들만의 힘으로 이라크를 공격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동맹국들을 '꾸중'까지 해가며 강경 입장을 보인 것은 미국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워온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혐의'가 여전히 입증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해 초부터 "이라크가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로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며 사전에 이라크를 쳐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지난해 11월 27일 무기전문가들로 이뤄진 사찰단을 이라크에 파견, 두 달 시한으로 대량살상무기 존재 여부를 조사해 왔다.

이 과정에서 안보리는 미국에 대해 "사찰단이 증거를 찾아내면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추가로 결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사찰 시한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사찰단은 속 빈 폭탄 껍데기 16개 외에는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에 따라 사찰단은 지난주부터 "사찰을 최소한 몇 달 더 연장해야 한다"고 유엔에 요구해 왔다. 안보리가 이를 받아들여 사찰 시한이 연장되면 미국은 적어도 그 기간 중에는 이라크를 공격하기 어렵다.

프랑스.독일 등 동맹국들이 "사찰이 완료되고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절대 공격해선 안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것도 미국에 부담이 되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21일 "미국이 안보리에 이라크 군사행동 결의안을 상정하면 반대하거나 기권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외무장관도 "사찰이 최소 두 달은 연장돼야 한다"면서 "미국의 군사행동 결의안이 상정되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일 기동부대 병력 3만7천명을 걸프해에 파견한 데 이어 에이브러햄 링컨호 등 2개의 항모전단을 같은 지역에 추가배치했다.

강찬호 기자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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