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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성공한 남편 둔 주부, 음독 자살 시도했던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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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난주 강남통신 기사를 보고 용기를 내 상담을 요청합니다. 저는 성공한 전문직 남편에 두 아이를 둔 결혼 13년차 강남 주부입니다. 이웃들은 항상 친절하고 웃는 저를 보며 행복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어쩜 그렇게 처녀처럼 날씬하게 자기 관리를 잘하느냐고 부러워 하지요. 그러나 빚 좋은 개살구입니다. 아무도 제가 얼마 전 음독 자살을 감행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거에요.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친구도 별로 만나지 않는, 오직 성공과 가정에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타박할 지 모르지만 전 이런 남편이 달갑지 않습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인간미 넘치고 실수투성이인 그런 남자를 보듬고 살고 싶어요. 남편은 늘 제게 일방적으로 소리지르고 훈계합니다. 전 다른 아내들처럼 남편과 서로 싸우는 여자가 아니라 남편한테 혼나는 여자입니다.

한번은 제가 집안일로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자 시어머님이 제 아이들 앞에서 저를 밀치고 때리려고 달려드시더군요. 남 보기에 부족한 게 없는 저이기에 이런 속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강남통신 독자 분들은 이 분 사연에 어떤 감정 반응이 일어나시는지요. 안타깝게 여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팔자 좋은 내용을 뽑아 보면 성공한 전문직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처녀 같은 외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 보기에 모두 대단한 성과물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마음이 너무 괴롭다 하십니다. 성취의 사주팔자와 멘탈(감정)의 사주팔자는 알고리즘이 다른 듯 합니다.

 요즘 식상할 정도로 힐링이 대세입니다. 힐링이 이렇게 유행하는 것은 세련된 사회로 나아가는 신호라기 보다는 이대로는 더 못살겠다는 통증의 SOS 신호입니다. 자살율 증가와 힐링의 유행은 색깔만 다를 뿐 결국 똑같은 현상을 반영한 셈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치가 없다 느낄 때 죽을 것 같은 통증을 느낍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감성적 느낌이 희박해질 때 힐링의 욕구가 생기고 그것이 만족되지 않을 때 자살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힐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힐링의 솔루션으로 공감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공감을 기반으로 한 감성 경영을 강조되고,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감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명함도 못내미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무 정치 조직이 없는 사람이 공감을 무기로 막판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공감은 내 입장이 아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입장에서 나를 이해해줄 때 우리는 따뜻함을 느끼고 마음의 고독과 통증에 위로가 찾아 옵니다. 이른바 ‘공감 테크닉’이 모든 영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공감은 단순한 기술이 아닙니다. 생물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공감하는 척 하는 것과 진짜 공감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능성 뇌영상 연구를 해보면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남의 고통을 진심으로 나의 고통으로 인식합니다. 문제는 고통을 동반하기에 내성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따뜻하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무감각 해지는 이유입니다. 특히 쌍방이 아닌 편도의 감성에너지 흐름은 공감을 고갈 시킵니다. 여기에 생물학적 진실 반응이 없는 기술로서의 얕은 공감은 상대방에게 더 깊은 고독을 느끼게 합니다. 힐링과 공감, 절절하고 따뜻한 이 두 단어가 유행하지만 우리 마음이 더 아파지는 이유입니다.

 

사연주신 분은 술·사람 좋아하는 인간미 넘치는 남자를 그리워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 ‘남편이 술 안 먹고 자기 일에 충실하면 됐지, 왠 날라리 남자 타령이야’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자신의 감성을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대상에 대한 애절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문자가 아닌 맥락을 통해 해석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바쁜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상징과 은유를 문맥적으로 해석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팔자 좋은 소리’나 ‘철 없는 소리’로만 들리게 되는 거죠.

 이 분의 통증은 자기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 정체성이 옅어지며 오는 통증은 곧 내 생물학적 기능이 끊어지는 두려움과 그 정도가 같습니다. 아마 독자분들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엄마, 그리고 아내라는 확실한 역할이 있는데 왜 정체성에 문제가 있느냐고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는 타이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서로 공감을 주고 받을 수 없는 데서 옵니다. 인간은 혼자서, 혹시 단지 타이틀만으로 자기가 존재한다는 감성적인 포만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타인과 사회와의 상호작용 안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을 때 내가 나라는 점이 뚜렷해집니다.

 사람이 열심히 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는 생존을 위해서이고 그 다음은 공감과 사랑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경쟁 위주 시스템에 휘말리게 되면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경쟁이란 싸움이고, 싸움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희생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입장을 내 입장처럼 고려할 때 어떻게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일에 집중하는 남편은 아내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홀이란 감성적인 공감의 결핍을 이야기 합니다. 만약 남편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라고 말한다면 이는 아내를 더 외롭게 합니다. 더욱이 ‘시월드’의 거친 요구가 동반되면 아내이자 며느리인 여성은 삶의 감성 에너지가 다 소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감성 에너지의 소진은 곧 자기 존재감의 상실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의 공감 능력도 저하시킵니다. 싸움이 일어 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죠. 사이코패스의 핵심 병리가 남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제로 상태인 것입니다. 공감 능력이 소진된 부부와 가족은 점점 극단적인 대응을 하기 쉽게 되고 이것은 더욱 감성 에너지를 소진케 하여 악순환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난 이 분에게 ‘남편과 주변 분들을 공감하라, 그리고 잘 커뮤니케이션 해보라, 그러다 보면 관계도 좋아지고 가족도 다시 행복을 찾을 것이다’라고 조언하고 싶지 않습니다현재 누군가를 공감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성 공감은 끝 없는 샘물이 아닙니다. 한정된 재원입니다.

 힐링과 공감에 지친 이들에게 필요한 심리학적 대안이 자기연민(Self-compassion)입니다. 내 약점과 한계를 공감이란 기술을 넘어 그냥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뇌 안에는 불안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 시스템과 내 자신의 어려움을 잘 보듬어 주는 연민 시스템이 함께 존재합니다. 지나친 자기 관리도 불안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연민이 없는 부끄러움과 자기비판 기능은 사람을 끝 없이 지치게 만듭니다.

 연민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용기입니다. 용기는 내 한계와 단점을 부끄러워하거나 자기 비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용기가 없는 자기 연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팔자 좋은 소리’란 말로 이 분을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용기 있게 자기 사연을 보낸 것에 힘을 실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깊은 연민의 정을 보냅니다. 공감에도 지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받아들임,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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