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한석규 주연 '이중간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동영상] '이중간첩'시사회장

캐롤 리드 감독의 1949년작 '제3의 사나이'에서 가짜 페니실린을 판 혐의로 연합군의 추적을 받던 해리 라임(오슨 웰스)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 마틴(조셉 코튼)에게 이렇게 말한다."이탈리아는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았지만 르네상스를 꽃피웠네.

하지만 5백년간 평화롭던 스위스는 뭘 만들었나? 고작 뻐꾸기 시계 아닌가." 그렇다면 분단상태에서 전쟁을 겪은 한반도는 반세기가 넘은 지금, 피 흘린 대가로 무엇을 얻었을까.

해리 라임의 말대로 이탈리아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얻었다지만 남과 북은 뻐꾸기 시계는 고사하고 오늘도 치열한 제로 섬 게임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이중간첩'은 그 냉혹한 게임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는 한 간첩을 통해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이념 다툼과 대의명분 추구가 인간의 행복에 아무 보탬이 되지 못했음을 비판하겠다는 의도다.

분단을 소재로 했지만 기존에 발표된 '쉬리''공동경비구역 JSA'와는 다른 점이 많다. 간첩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쉬리'와는 달리 남과 북, 선과 악을 명확하게 갈라놓지 않는다. 북은 주인공 림병호(한석규)를 배신자 취급하고, 남은 그를 간첩단 사건에 이용하려 한다.

휴머니즘에 대한 접근도 'JSA'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JSA'는 남북한 병사의 만남을 살갑고 코믹한 에피소드로 처리해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란 메시지를 전했다.

반면 '이중간첩'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훨씬 어둡고 절박하다. 림병호는 월남 후 인간애를 느낄 새도 없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우정을 꽃피울만 하면 배신을 당한다.

'이중간첩'은 간첩과 관련된 사건 묘사에서도 지금까지 남북 문제를 다룬 그 어떤 TV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나아갔다. 국가 정보기관의 활동과 관련해 그간 설(說)로 떠돌거나 부분적으로만 확인이 됐던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영상화했다.

가령 귀순 용사는 대한민국의 환대를 받기 전 사상 검증을 위해 입 속에 전기 충격을 주는 등의 고문을 당한다거나, 남파 간첩뿐 아니라 북파 간첩도 있고 그들은 침투 전 온갖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는 유의 '공공연한 비밀'이 그대로 드러난다.

간첩들의 인간적 갈등을 조명한 점도 다소 파격적이다. 원치 않지만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송경만을 고문해야 하는 림병호와 태어나면서부터 간첩으로 운명지워진 고정간첩 윤수미(고소영)의 인간적 고뇌 등이 차분하게 그려진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노력한 듯한 이러한 흔적들은 때론 너무나 선명하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라면 반감을 갖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이중간첩'은 찬사를 받을 만한 이런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로서 단숨에 관객의 호흡을 휘어잡을 흡인력은 부족해 보인다.

'쉬리'처럼 당시로선 획기적인 액션을 중점 부각한 정통 첩보영화도 아니요, 림병호와 그를 사랑해 북의 지령을 거부하는 윤수미의 로맨스도 애절하게 다가오는 호소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림병호가 사상과 체제에 대한 갈등에서가 아니라, 목숨과 사랑을 위해 제3국을 선택한다는 점에 관객이 얼마나 공감할지 의문스럽다.

그래서 충무로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한석규의 연기는 수준급이지만, 보는 사람을 확실하게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오히려 정보국장 백승철을 연기한 천호진의 냉혹한 카리스마가 더 눈에 들어온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이자 '공공의 적' 시나리오를 썼던 김현정 감독의 데뷔작. 2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