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 반지 던져버린, 텅 빈 마음에 스미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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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호 31면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피아노 반주를 한 로테 레만의 슈만 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이 실려 있다.

세상에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사람들도 많다. 방송국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손을 잡고 옆구리를 툭툭 치는 조영남씨를 내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한때 같은 위원회 멤버로 술자리도 함께 하고 몇 차례 인터뷰도 나눈 정운찬 전 총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까. 토론회장에서는 험악한 말싸움을 주고받지만 나오자마자 곧장 친근한 형님처럼 느껴지는 자칭타칭 원조보수 전원책 변호사는? 언제부터인가 거리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정동영 의장은? 나는 이분들과 내 여자 문제를 상의한 적이 없다. 뒤죽박죽인 은행잔액 상태를 털어놓은 적도 없다. 이유 없이 전화할 수 있고 여자 문제와 돈 사정을 공유해야 잘 아는 사이라고 여기는 내게 이 ‘사이의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버스 정류장 비슷한 방송국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詩人의 음악 읽기] 내 인생의 음악 <상>

며칠 전 이 사이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일이 있었다. 아, 경향신문 유인경 선수! 본인의 책을 내서 출판기념회를 한단다. 작업실 바깥의 저녁모임에 한 달에 한두 차례 이상 나가지 않는 내 기질을 알아서인가. 안 오면 죽일 듯한 문자가 거듭 오는 터라 도리 없이 찾아간 정동 성프란치스코 회관은 유명인사 전원출동의 밤을 이루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인사들을 포함해 TV, 신문, 잡지에서 익히 본 얼굴들이 그득한데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사교적 표정으로 수많은 악수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게 세상이리라. 아는 사이를 엄격하게 규정하면 채 열 명을 넘어설 수가 없을 테니.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관계처럼 애매함을 넘어 내가 정말로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음악은 무엇일까. 지식으로 아는 것을 규정한다면 90년대에 광분했던 얼터너티브, 브릿팝 등 모던록의 맹장들이리라. 애착으로 치면 밥 딜런을 포함한 60년대 포크뮤직의 거장들이리라. 깊은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치면 단연 슈만과 벨라 바르톡이, 부담없이 자주 즐긴 대상이라면 블루노트, 버브, 파블로, ECM 같은 레이블의 재즈장인들이리라. 그렇지만 그럭저럭한 사이의 관계가 아닌, 존재의 살갗에 문신처럼 새겨진 내가 아는 음악은 무엇일까. 바로 그런 음악의 목록을 작성할 일이 생겼다. 진지하지만 소박한 어떤 클래식 음악동호회에서 이른바 내 인생의 음악을 선정해 감상회를 연다며 발표를 부탁해 왔다. 한나절 동안 온갖 음반을 틀어가며 정말 진지하게 그 과제를 생각해 봤다. 어떤 곡이 내가 잘 아는 내 인생의 음악인 걸까.

첫 번째 선곡은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 손에 낀 커플링 약혼반지를 빼서 달리는 차량들 속으로 멀리멀리 던져버려야 했던 날 마음의 텅 빈 우물 속에서 들려오던 사운드트랙이 바로 이 곡이었다. 그후 이 곡이 담긴 음반이라면 모두 다 구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현재까지는 브리기테 파스밴더와 브루노 발터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로테 레만의 노래(위 사진)가 최상으로 여겨진다. 억제된 슬픔으로 격조의 끝을 보이는 파스밴더, 남성 호르몬이 증가한 상태의 여성성이 무언지 알려주는 로테 레만이다.

다음 곡은 비탈리의 샤콘이다. 지금은 없어진 인사동의 어떤 찻집이 있다. 그 집 주인은 문화예술 언저리의 증언자, 그러나 불우한 뒤안길의 인물이었다. 그가 그 찻집에서 아끼면서 틀어주던 LP음반이 바로 이 곡이고 나중에 CD로도 출시됐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CD 타이틀의 저작권은 그 찻집 형님의 몫이련만 아는 이가 없다. 일종의 바이올린 소품인 이 곡은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연주한 오케스트라 반주 버전이어야 한다. 오르간 반주에 맞춘 헨릭 셰링 연주본이 또 나왔지만 특유의 음울함이 사라지고 너무 양명하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 그 길이 뒤안길이고 비주류이고 어떤 의미에서 이탈자의 길이라는 행보를 수긍한다면 샤콘 후반부의 서늘한 디크레셴도와 함께 미끄러져 내릴 수 있으리라. 이 곡은 평생 동안 미끄러져 내리는, 그래서 언제나 과거는 찬란하고 현재는 최악으로 상정되는 성격파들 전용음악이다.

다음으로는 레오시 야나첵의 피아노 소나타 ‘1905년 거리에서’를 들고 싶다. 제1곡 ‘예감’, 제2곡 ‘죽음’으로 구성된 이 곡은 체코 노동자 항거를 표현했다는 배경을 떠나서 피아노로 한숨을 쉬고 중얼거리거나 소리를 빽빽 지를 수 있다는 예증이다. 정말로 피아노가 음악을 버리고 말하거나 한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마리오스 파파도풀로스의 연주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괴물 같은 피아니스트로 데미단코나 레슬리 하워드를 빼놓을 수 없겠는데 파파도풀로스도 못지 않다. 그의 연주를 연기로 비유하면 말런 브랜도와 같다. 듣노라면 아주 작아지는 기분이 들고 숨을 조이게 되는 연주, 그것은 야나첵의 의도였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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