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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대신 지식으로 탈세 잡는 ‘지하경제 저격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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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호 11면

조세정의네트워크의 한국ㆍ동북아시아 담당자 이유영씨가 조세피난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역외 탈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이유영(43)씨는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 한국ㆍ동북아 담당자로 활동한다.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조세피난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역외 탈세를 감시ㆍ고발하는 국제 비정부기구(NGO)다. 한마디로 ‘지하경제 저격수’다. 그는 외모부터 전형적인 시민운동가와 다르다. 늘 깔끔한 정장 차림이다. 매고 다니는 백팩엔 아이패드와 각종 영문 보고서로 가득하다. 명함엔 투자 컨설팅회사인 ‘브리오 컨설팅 그룹’ 대표이사로 돼 있다. 조세정의네트워크 한국지부의 회원은 이씨 한 명밖에 없다. 1인 NGO인 셈이다.

파워 차세대 <20> 국제 NGO ‘조세정의네트워크’의 이유영 한국 담당

그렇다고 조세정의네트워크와 그를 얕볼 순 없다. 이 단체는 미국ㆍ영국과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럽연합(EU) 등 국제기구에 탈세 방지책을 제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뉴욕타임스ㆍ파이낸셜타임스 등 해외 언론은 이 단체의 보고서를 곧잘 인용해 보도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핫(hot)한 NGO”다. 잠깐-. ‘hot’뿐만이 아니었다. 이씨는 인터뷰 내내 ‘repatriation(과실송금)’ ‘quant(퀀트ㆍQuantitative Analyst·금융전문가의 준말)’ 같은 금융과 관련한 영어 단어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나도 원래 퀀트였다”고 말했다. 금융전문가 출신의 시민운동가라니.

제주 출신…대학 중퇴하고 군 복무 후 유학
그는 미국 서부의 클레어몬트 매케나 칼리지(CMC)에서 수학ㆍ경제학을 전공했다. CMC라고 불리는 이 대학의 학생은 모두 4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제적인 투자회사 KRR의 헨리 크래비스(69) 회장 등 미 금융계의 거물들을 배출한 대학이다. 그는 또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ㆍ캘리포니아주립대학 미헤일로 경영경제대학원에서 석사를 각각 땄다. 미국 서부의 최대 자산관리회사 TCW, 미국 최대 모기지 은행 인디맥, 세계 최대 컨설팅·회계법인 언스트 앤드 영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세계 유수의 싱크탱크인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의 회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남달라도 아주 남다른 스펙이다.
하지만 이씨는 강남 8학군도, 특목고 출신도 아니었다. 1970년 제주도 서귀포 중문단지에서 태어나 평범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랐다. 제주사대부고 시절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면서도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운동권 서적’에 탐닉했다. 이씨는 “당시 억압적 분위기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반감이 컸다. ‘이재수의 난’을 일으킨 이재수와 같은 고부 이씨 집안이다. 원래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고 말했다. 다만 영어를 좋아해 영어 성적만큼은 우수했다. 이씨는 고교 2학년 때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게 됐다. 포퍼는 이 책에서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번역본이 마음에 안 들어 영어 원서로 완독했다”며 “당시 답답했던 한국 사회를 넘어 더 큰 세계에 내가 몰랐던 다른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88년 지방의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이씨는 입학한 지 며칠 후 바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1년 가까운 여행에서 돌아와선 부모에게 “해외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일단 군대를 다녀온 뒤 생각해보자”는 타협안을 내놨다. 이씨는 군 제대 후인 92년 미국 CMC에 입학했다. “수학의 재닛 마이어리 교수, 경제학의 재닛 스미스 교수 등 쟁쟁한 스승에게서 배우고 싶어 CMC를 지원했다”며 “SAT를 따로 보진 않았지만 계속 에세이를 보내면서 잠재적 가능성을 부각시켜 입학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취임사』를 모두 외웠던 게 영작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다.
이른바 명문대학이라는 CMC에서의 공부는 혹독했다. 일대일 방식의 강의에다 수업시간마다 거의 매번 시험이 있었다. 페이퍼를 열댓 번이나 퇴짜 맞은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엔 면전에서 “실망스럽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이씨는 “미국 학생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돼 학기 중 3시간 넘게 잠을 잔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97년 졸업 후 이씨는 미국 금융계에 뛰어들었다. 경영학ㆍ회계학을 전공한 덕에 직장을 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십만 달러 연봉에 큰 저택과 값비싼 차, 잘나가던 주택금융업체인 인디맥에서 근무할 때 이씨가 누렸던 것들이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서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만 더 간절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2002년 탐사전문기자 출신의 니컬러스 색슨 등 조세정의네트워크 회원들과 알게 됐다. 그들의 취지엔 공감했지만 바쁜 현업 때문에 동참하진 못했다.

전세계 조세 피난처에서 벌어지는 역외 탈세의 실태를 고발하는 『보물섬』. 이씨가 번역했다.

인생의 전환점은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였다. 이씨는 “국제 금융거래가 늘어났지만 일자리는 오히려 줄고 실물경제는 더 나빠졌다”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잊은 채 이익만 좇다 보니 금융위기까지 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전문가로 일하면서 일부 기업이 이익을 해외로 몰래 빼돌리는 장면을 많이 목격한 것도 작용했다. “그때마다 ‘늘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씨는 2011년 귀국했다.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정책자문을 했다. 미국 금융전문가들의 경우 한창 활동할 시기에 2년가량 쉬면서 공익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처음에는 국제금융에 관한 책을 한 권 쓰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지난해 색슨으로부터 전 세계 조세피난처에서 벌어지는 역외탈세의 실태를 고발하는 『보물섬』 출간 소식을 들었다. 단숨에 그 책을 읽은 이씨는 석 달 동안 번역작업에 몰두했다. 이씨는 “노트북을 무릎 위에 놓고 작업하다 나중엔 화상으로 인한 피부병이 걸렸다. ‘영광의 상처’인 셈”이라고 웃었다. 지난해 5월엔 조세정의네트워크의 첫 한국인 회원으로 가입했다.

조세정의네트워크의 핵심은 미국ㆍ영국ㆍ네덜란드ㆍ인도ㆍ스위스 등 10여 개국, 30여 명의 전문가다. 이들의 직업은 주로 금융전문가ㆍ경제학자ㆍ변호사ㆍ회계사ㆍ기자 등이다. 이씨는 “조세정의네트워크는 투쟁가 모임이 아니라 전문가 모임이고, 반(反)시장주의자라기보다는 친(親)시장주의자”라며 “시위 대신 보고서ㆍ토론회를 통해 각자의 주장을 펼친다”고 말했다. 각계 전문가 모임이기 때문에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 이씨는 “한국의 여러 시민단체와 협력을 모색해봤지만 방법론과 관점이 달라 혼자 활동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1월 영국 의회는 자국 안에서 큰 수익을 거두면서 법인세를 조금만 냈던 스타벅스·아마존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 관계자들을 청문회로 불러냈다. 미 정부는 2010년 미신고 해외계좌를 규제하는 해외금융계좌신고제도(FATCA)를 시행했다. 이런 모든 조치의 배경엔 조세정의네트워크가 있다. 이 단체는 영국 의회 청문회에 참여했고, 미국의 탈세 규제 법안의 제정 과정을 도왔다.
조세정의네트워크에 따르면 각국에서 천문학적 금액이 복잡한 돈세탁 과정을 통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ㆍ케이맨제도 등 카리브해의 섬나라나 스위스ㆍ리히텐슈타인과 같은 소국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른바 조세피난처다. 이 돈의 종착역은 물론 따로 있다. 조세피난처는 돈세탁을 해주거나 잠시 보관하는 곳에 불과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의 부는 줄고 국민의 세금 부담은 늘어난다. 또 그 돈을 불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된다. 시에라리온ㆍ리베리아ㆍ앙골라 등 아프리카 국가가 대표적 예다. 꼬리표 없는 돈들이 다이아몬드 사업에 투자되거나 자원개발 사업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면서 내전ㆍ학살ㆍ소년병ㆍ강제노동과 같은 참혹한 현실이 연출된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배경이다. 이씨는 “조세정의네트워크의 전문가들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지금이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총 7700억 달러 해외 유출 추정
역외 탈세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97년 외환위기를 정점으로 지금까지 모두 7700억 달러(약 888조원)의 국부가 해외로 빠져나갔다고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추정한다. 특히 구조조정ㆍ해외자본 유치 등을 악용해 말레이시아ㆍ홍콩ㆍ싱가포르로의 국부 유출이 많았다고 한다. 이씨는 “한때 외국계 구조조정전문회사(CRC)가 ‘한국어 능통자’를 찾는 특수(特需)가 일었던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주장은 “기업이 시민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게 하려면 우선 국제 금융거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론 기업이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 탈세 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조세법원의 설립 ▶ 검찰·국세청의 공조 강화 ▶ 역외 탈세 조사 인력과 예산 확대 등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제언이다. 이씨는 “한국인의 역외 탈세에 대해선 그런 대로 규제장치가 마련됐지만 외국의 다국적 기업에 대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우려했다.

이씨는 조세정의네트워크 일을 하면서 수입이 확 줄었다. “그러나 정말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매일 근무시간의 55%는 민간기업 컨설팅에, 나머지 45%는 공공부문 정책 조언에 할애한다. 55세 이후에는 공공부문 일을 더 늘릴 생각”이라고 말하면서다. 그에겐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붇돋워주는 말이 있다. 피터 드러커와 함께 기업인들의 멘토로 인정받는 경영학자 리처드 엘스워스가 직접 써준 문구다. “당신이 갖고 있는 뛰어난 리더십 자질이 당신과 교류하는 모든 사람의 인생에 의미가 있기를….” 개인의 자질·능력이 공동의 가치와 의미 있는 변화를 추구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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