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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못지킬 법 왜 만드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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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켜야 할 법

정기국회가 끝난 지 닷새 만에 임시국회가 열린다. 국회의원들이 나라 걱정이 많고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정기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한 내년 예산안 때문에 허겁지겁 여는 것이다.

올해도 국회는 예산안 처리 시한을 못지켰다. 그러고도 여당이고 야당이고 사과 한마디 없다. 주변에서도 '또 그랬나'하며 관행으로 여길 정도다.

*** 예산안 시한 있으나마나

헌법(54조2항)은 국회의 예산안 의결시한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 2일로 정했다. 행정부의 예산집행을 위한 준비기간을 한달은 주어야 무리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 조항은 벌써 몇년째 '안 지키는 법'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은 12월 9일, 99년은 12월 18일에 예산안이 통과됐다. 2000년은 12월 27일로 가장 늦게 처리한 기록을 세웠다. 올해는 그나마 지난해보다 며칠 앞당길 것 같다는 점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2 지키기 어려운 법

의원들은 지켜야 할 헌법은 안 지키고 이상야릇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있으나마나 하거나, 시장을 왜곡하고, 괜한 사람을 잠재적 범법자로 만들고, 편법의식을 키울 수 있는 법안이 올 정기국회에서 통과됐다.

먼저 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보자.전세를 월세로 바꿀 때 월세 이자율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힘 없는 세입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인데 현실에서 적용하기 어렵다. 기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집주인은 2년 계약기간에는 전세를 월세로 바꿀 수 없다. 계약기간이 지나면 그전 세입자와 계약할 의무도 없다. 전세를 월세로 바꾸고 싶으면 다른 사람과 계약하면 되고,이 때는 월세 이자율 제한을 지킬 필요가 없다. 따라서 월세 이자율 제한은 공허한 규정으로 남게 생겼다.

이 규정이 들어간 과정은 더욱 기가 막힌다. 상가임대차보호법안을 논의하면서 월세 상한규정을 검토하던 의원들이 '이왕이면 주택에도 적용하자'고 합의해 끼워 넣었다.

#3 지키면 문제가 커질 법

장사가 될만하면 임대료를 올리는 건물주의 등쌀에 시달리는 영세상인을 보호하자는 새 상가임대차보호법에도 곳곳에 함정이 있다. 우선 자동으로 계약이 연장되는 기간 5년이 너무 길다. 건물주로선 처음 계약할 때 5년 의무 임대기간에 보증금과 월세를 일정비율 이상 못 올리는 점을 감안해 임대료를 충분히 받으려 들 것이다.

무리하게 법을 만들어 시장을 찍어 내리면 실효는 거의 없고 부작용이 생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말 개정해 올 7월부터 시행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이다.

동네 슈퍼마켓과 구멍가게 등 중소유통업체와 운수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의 셔틀버스 운행을 금지했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 동네상권은 살아나지 않았다. 백화점과 할인점 매출은 여전히 늘었고, 너도 나도 승용차를 몰고 오는 바람에 소비자가 불편하고 교통체증도 심해졌다.

지키기 어렵고, 지키면 문제가 커지는 이런 법들은 의원입법의 한계를 안고 있다. 일부 정부 부처에선 실무진들이 입안한 것을 건네 의원입법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행정부처 발의에 비해 의원입법은 '입법예고→법제처 심의→차관회의 의결→국무회의 의결' 등에 이르는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국회 상임위에 보고해 심의할 수 있다.

*** 후유증 ·파장 생각 했으면

의원으로선 입법실적을 올려서 좋고, 해당부처로선 이해 당사자나 다른 부처의 시비와 복잡한 절차를 피할 수 있어 서로 이용하는 셈이다. 정부가 내는 법안은 국무회의 의결까지 행정부 안 절차에만 두달 이상 걸리는데 의원입법은 일주일 만에 통과될 수도 있다.

법대로 지키는 것 못잖게 법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는 말 그대로 입법부(立法府)다. 여기서 절실한 필요성과 후유증과 파장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인기나 표를 의식해 현실성이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양재찬 경제부장 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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