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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경찰 사이 무간지옥…신세계 보이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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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조폭에 들어가는 경찰을 연기한 이정재. “영화 ‘무간도’와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만, 어느 순간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도훈 기자]

불안한 경계인. 영화 ‘신세계’(박훈정 감독, 21일 개봉)에서 배우 이정재(40)의 위치가 딱 그랬다.

 배역부터 그렇다. 이정재는 경찰과 조폭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잠입경찰’ 이자성을 맡았다. 얼핏 홍콩영화 ‘무간도’가 떠오른다. 경찰간부 강 과장(최민식)의 지시로 기업형 조폭에 들어간 지 8년. 간교한 강 과장이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몰라 불안하다. 그런데 감시 대상인 조폭 2인자 정청(황정민)은 그에게 두터운 신뢰를 보낸다.

 이정재는 두 괴물 같은 배우, 최민식과 황정민 사이에 서 있다. 두 배우의 카리스마 틈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 “깡패새끼들도 나를 믿는데, 경찰이 나를 못 믿느냐”며 절규할 때조차 그의 분노는 100% 연소되지 않는다. ‘분출하지 않는 연기’라는 감독의 지시에 충실했다.

 그는 이자성을 연기하느라 살이 빠지고, 담배도 다시 물게 됐다고 했다. “자성은 불안과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은 인물입니다. 발산하는 연기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자성처럼 자신을 억누르는 캐릭터는 스트레스가 쌓여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주인공은 제가 처음일 겁니다.”

 이정재는 이번에 ‘공존의 미학’을 느꼈다고 했다. “원래 프로들은 조화에 심혈을 기울여요. 책임감을 나눠 갖고, 공존의 길을 찾죠. 그런 미덕은 지난해 ‘도둑들’에서도 체득했죠.”

 ‘신세계’는 정청과 자성간의 끈끈한 의리에 많은 공을 들인다. 정청이 늘 ‘브라더’라 부르던 자성의 정체를 알게 되고, 자성이 결단의 선택을 하면서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생존? 권력욕? 배신? 자성의 선택을 하나의 이유만으로 설명할 순 없습니다. 자성이 스스로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했겠죠. 저도 영화를 찍으며 정체성,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드라마 ‘모래시계’의 보디가드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이정재. 하지만 영화배우로서의 존재감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하녀’로 프랑스 칸영화제 레드 카펫에 서보고, ‘도둑들’로 흥행 반열에도 올랐으나 ‘연기’와 ‘인기’ 중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지 못했다. 그의 표현대로 ‘어쩌다 보니’ 스타가 돼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부를 누리기도 했다. 연기에 대한 과욕 탓에 작품이 들어오지 않던 때도 있었고, 사업 실패와 스캔들에 시달리기도 했다.

 “부와 권력이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풍성한 인간관계 속에서 재미있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죠. 변해가는 내 자신을 보는 게 나이 먹는 재미인가 봐요.”

 이제 불혹에 접어든 그는 연기가 자신의 ‘신세계’라고 말했다. 현재 촬영 중인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아 송강호와 호흡을 맞춘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저를 살려준 건 ‘왜 요즘 연기 안 해’라는 식당 아주머니의 꾸짖음이었어요. 입맛에 맞지 않아도, 흥미 있는 작품이라면 무조건 하자고 결심했죠. ‘하녀’의 부잣집 속물 남성은 정말 싫었지만, 제 안의 벽을 허무는 느낌이 들었죠. 이젠 뭔가 꾸미지 않고도 진짜를 연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글=정현목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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