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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1) 탄핵 그리고 대통령 대행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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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기 직전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여야 의원들과 경호원들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3월 12일 날씨는 맑았다. 이날의 폭풍을 나는 예감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날 서울에 없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남에 가 있었다. 국회에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기세가 등등했고 집권당에서 하루아침에 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고 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노 대통령은 ‘설마?’ 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예정됐던 행사니 가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탄핵 소추안이 통과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점거한 단상 아래서 한나라당이 탄핵 사유를 읽는 정치적 선언만 하고 마치려니 했다. 표가 당연히 모자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 사건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놨다.

 오전 11시10분쯤.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총리 집무실 별실에서 TV 생중계를 통해 여의도 국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장석 주변에선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시루떡 같았다. 여당 의원 한 겹, 야당 의원 한 겹 뒤섞여 있었다. 여든, 야든 한 당이 똘똘 뭉쳐 의장석을 지켰던 이전 단상 점거와는 달랐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한 상태였다. 국회 경위들이 우르르 달려가 국회의장 단상 주변을 가로막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통과되겠네.’ 내가 처음으로 위기를 직감한 것은 그때였다.

 “어. 어. 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직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야 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올 수 있겠다 싶었다. 놀라움에 맥박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별실 서가에 있던 『헌법학 개론』 책부터 집어 들었다.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 그 이후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것은 국무총리인 나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통령 탄핵에 대비한 국정 위기 관리 매뉴얼 따위는 없었다. 직감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때가 오전 11시30분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하나하나 되뇌기 시작했다.

 ‘만약 통과가 된다면 이거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안보가 중요하니까 우선 조영길 국방장관을 찾아야겠다. 조 장관에게 전화를…. 아. 내가 아직 대통령 권한대행이 아닌데…. 그럼 청와대 비서실에 양해부터 구해야겠구나.’

 바로 인터폰으로 지시했다.

 “김우식 비서실장 연결해줘요. 빨리.”

 시간이 없었다. 김 실장에게 왜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통과될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렇게 하시죠.”

 김 실장은 이날 노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도 TV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였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내 마음도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비감(悲感)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오전 11시40분, 서둘러 비서실에 말했다. “조영길 국방장관 연결해요.” 조 장관과는 통화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을 수행해 행사에 참석하느라 통화할 수 없다는 비서실의 답이 돌아왔다. 대신 유보선 국방부 차관과 통화했다.

 “만일 탄핵안이 통과되면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하는데 뭘 내려야 하는 거요? 데프콘 같은 전군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해야 합니까?”

 “총리님, 그것까지는 아니고요. 군 지휘관들을 정위치하도록 하는 전국 지휘경계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요. 만일 탄핵안이 통과된다면 바로 지휘경계령을 발동하세요. 그리고 국방장관에게 바로 보고하도록 해요.”

 이어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에게 전화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상근무 태세를 갖춰주세요.”

 국방 다음은 외교였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찾았다. 반 장관과 휴대전화로 연결됐다. 주한 외교 사절들을 데리고 대전행 KTX 시승 행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주재 대사들 모여 있죠?”

 “네. 곧 내려서 오찬 행사를 할 겁니다.”

 “점심 행사하면서 이 얘기를 꼭 해주세요.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안보·경제정책에 추호의 변화는 없다.’ 이렇게 말입니다. 각 대사에게 분명히 알리세요. 똑같은 내용을 해외 주재 공관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도 전달하도록 하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아, 특히 6자회담에 참가하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4개국 외무장관에게는 직접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을 알려야 합니다.”

 “네. 총리님.”

 오전 11시57분. TV에서 박관용 의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195표 중 가(可) 193표, 부(否) 2표로 헌법 제65조에 의해 탄핵안이 가결됐음을 선언합니다.”

 탄핵안이 통과됐다. 이제 분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로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면 헌재로 넘어간다. 과도기가 길어선 안 된다.

 “심의기간을 가급적 단축시켜 주십시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처음 있는 일이라서 저도 잘 모르겠네요.”

 윤 소장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묻어있었다. 그에게도 예상치 못한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전화했다.

 “전국 경찰의 경계태세를 강화하십시오.”

 경제·외교·안보 관계 장관회의를 오후 1시30분 소집하겠다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눈앞이 캄캄했다. 내 인생 가장 길었던 63일의 시작이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역사 속 그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국회가 2004년 3월 1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의결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 108명,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탄핵 소추안을 발의·의결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1년2개월 만에 직무 정지됐고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정을 꾸려 갔다. 그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소추안 기각을 결정한다. 노 대통령은 직무 정지 63일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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