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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의 세상탐사] 8년 전 헌법재판소가 간과한 것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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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호 31면

8년 전인 2005년 11월 24일. 헌법재판소는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특별법’에 대해 ‘합헌’이라고 선고하면서 그 결정 이유 중 하나로 정보통신 발전에 따른 화상회의를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헌재는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우리나라 수도는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에 위반된다며 위헌 결정을 했다. 그러자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의원을 주축으로 한 151명이 편법 대책으로 세종시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위헌 논쟁이 재발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헌재가 합헌 선고를 하면서 결정 이유로 화상회의 논리까지 꺼내들었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공간의 의미는 축소되고, 실질적으로 정보와 정보기술을 장악하는지 여부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장소적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더라도 대통령과 행정 각부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수단이 확보되기만 하면 대통령이 의사결정을 통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무총리와 12부, 4처, 2청이 세종시로 이전하게 된 중요한 근거였다.

화상회의는 한때 선진국에서 시간과 경비를 절감해 준다며 너도나도 활용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시들해졌다. 왜 그럴까.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화상회의 시스템은 임장감(臨場感)이 점점 더 개선돼 활용도가 높아져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실태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임장감이란 클래식 음악의 스테레오 용어로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말한다. 주로 50인치 대형 스크린 2개와 TV카메라 2대, 전화회선 24개, 음성과 영상을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비디오 코덱 등이 임장감을 높여준다.

하지만 화상회의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학자 다이앤 본의 챌린저호 폭발사고 보고서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된 뒤 73초 만에 공중 폭발해 승무원 전원이 몰사한 것이 바로 하루 전에 열렸던 화상회의 때문이라는 분석이 담겨 있었다(『최선의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토머스 대븐포트·브룩맨빌 지음, 도서출판 프리뷰). 미 항공우주국(NASA)은 최종 발사 허가를 비행준비검토회의(FRR)에서 한다. 케네디우주센터와 마셜우주센터, 발사 현장 등 세 군데에서 150여 명이 화상회의를 통해 발사를 확정했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고무패킹 제조업체의 엔지니어들은 날씨가 추워 O-링(접합용 고무패킹)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챌린저호는 결합부를 밀봉하는 O-링에 이상이 생기면서 고열의 불꽃이 누출돼 외부 연료통에 불이 붙어 폭발했다. 화상회의 때문에 현장 엔지니어들의 우려가 지휘부에 명확하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게 다이앤 본의 결론이다. 화상회의로 인해 엔지니어들의 불편한 심경이 표출됐을지도 모를 ‘보디 랭귀지’도 놓쳤다고 했다.

이후 NASA는 중요한 회의는 반드시 케네디우주센터의 제2운영빌딩에 함께 모여 한다. 탑승할 우주비행사뿐 아니라 '현인'이라 불리는 전직 NASA 직원까지 동굴같이 널찍한 방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최종 결정을 한다. 화상회의로 인한 부주의와 오해, 불완전한 의사전달을 막기 위해서다.

우리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각각 서울과 세종시에 멀리 떨어져 있다. 대통령과 총리는 매주 주례회의를 한다. 또 화요일마다 국무회의가 열려 한 번은 대통령이 주재하고, 한 번은 국무총리가 주재한다. 헌법재판소의 논리처럼 정부는 화상 국무회의를 더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대통령과 총리, 행정 각부 장관이 화상회의를 통해 수많은 정책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긴 뒤 행정부처가 분산돼 화상회의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부처 간 의사소통을 위해 셔틀 비행기를 하루 22회까지 왕복 운항하기도 했다. 2002년 방한했던 휼렛패커드(HP)의 칼리 피오리나 당시 회장도 “나는 정보통신 업체 대표지만 화상회의보다 대면회의를 중시한다. 왜냐하면 가장 강력한 소통수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남북 대치 국면이라는 특수상황까지 있다. 연평도 포격 사태와 같은 긴박한 안보상황이 터졌을 때 대통령과 총리, 국방장관 등이 화상회의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챌린저호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여지가 있다. 불완전한 의사 전달, 허위 보고 등도 우려된다. 일상적인 회의는 몰라도 국가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정책과 안건을 화상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정치적 소산인 세종시에 치러야 할 국가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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