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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뜨는 '당일치기 7만원 해외여행'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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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달 26일 부산항을 통해 쓰시마로 온 관광객들이 이즈하라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쓰시마=송봉근 기자]

7만~8만원이면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북한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땅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흔히 대마도(對馬島)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통하는 일본 쓰시마 섬 얘기다. 일본 본토보다 한국이 더 가까운 쓰시마는 부산에서 뱃길로 1~2시간이면 닿는다. 부산 사람들에겐 설악산이나 제주도 여행을 가는 것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당일치기로도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① 관광객들이 부산여객터미널에서 인터넷이나 백화점 면세점에서 미리 구입한 물품을 찾아 여행용 가방에 담고 있다. ②당일 쓰시마 관광에 나선 부부가 딸과 함께 이즈하라의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활짝 웃고 있다. ③ 이즈하라의 한 수퍼마켓 내부에 걸려 있는 우리말 상품 안내 문구. [쓰시마=송봉근 기자]

 최근 쓰시마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쓰시마행 여객선 탑승객 수는 29만3200명으로 2011년에 비해 5배 가까이 늘었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당일치기 관광객이라는 게 여행사들의 분석이다. 쓰시마 여행이 인기를 끄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26일 국제여객선을 타고 관광객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하루 만에 대한해협을 왕복해 보았다.

 오전 7시, 터미널 1층 대합실과 2층 출국장은 이른 아침부터 승객들로 북적거렸다. 곳곳에서 여행사 직원들이 관광객 10여 명씩 모아 여권을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오전 8시발 코비호는 정원 200석의 표가 주중에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오전 9시30분에 출발하는 오션플라워호도 445석이 대부분 꽉 찼다. 오전 8시 배를 타면 9시55분에 쓰시마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항에 닿는다. 오후 4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코비호를 타면 숙박하지 않고도 6시간 가까이 쓰시마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회사원 이주영(31·여·부산시 해운대구)씨는 “이번이 세 번째 쓰시마 여행”이라고 했다. 그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일상에서 벗어나 이국 풍광을 보며 기분전환을 할 수 있고, 쇼핑만 잘하면 배삯을 뽑을 수 있어 사실상 공짜 여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제아무리 가까운 곳이라 해도 여권을 제시하고 출입국 수속을 밟아야 하는 엄연한 해외여행이기 때문에 면세점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게 쓰시마 관광의 큰 메리트라는 얘기다. 이씨는 “출국 1시간30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해 배에 오르기까지 한국관광공사가 직영하는 터미널 면세점에서 화장품 등 15만원어치의 면세품을 샀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부산여객터미널의 면세점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공항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술과 담배, 화장품, 가방, 건강 보조식품 등이 구비돼 있었다. 대학 친구 4명과 함께 온 최정희(33)씨는 “설 명절을 앞두고 있어 1인당 30만원쯤 면세품을 구입했다”며 “공항 면세점보다 가격이 더 싼 물건이 많다”고 말했다.

 미리 시중의 백화점 내 면세점이나 인터넷 면세점에서 구입한 물품을 찾는 곳도 붐비긴 마찬가지였다. 고향 친구 6명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 김수민(47·여·부산시 남구)씨는 “며칠 전부터 평소 필요한 물품을 인터넷이나 백화점 면세점에서 구입했다”며 “여행도 하고 쇼핑도 하고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터미널 청소를 하는 직원은 “주말에는 면세점 물품을 담은 포장지나 비닐가방을 버린 쓰레기만 대형 비닐봉투(200L)로 10개쯤 나온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출항하는 여객선은 북쪽 히타카쓰(比田勝)와 남쪽 이즈하라 두 곳으로 취항한다. 이 가운데 쓰시마의 중심지는 이즈하라다. 이즈하라에는 한국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최근 베스트셀러 소설로 널리 알려진 고종 막내딸 덕혜옹주의 비운의 일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혼기념비, 쓰시마에 유배돼 일생을 마친 구한말 우국지사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슈젠지(修善寺) 등은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배에서 내린 뒤 입국심사를 마친 승객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유적지를 관람하러 갔다.

 쓰시마 섬 곳곳에 설치된 전망대에 올라 한국의 다도해보다 더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의 절경을 감상하거나 섬 전역에 흩어져 있는 관광지에 가려면 이즈하라를 벗어나 자동차로 이동해야 한다. 봄·가을철엔 낚시를 즐기거나 여름철엔 해수욕을 위해 쓰시마를 찾는 사람도 많다. 그러기엔 5∼6시간의 체류시간으로는 빠듯하고 현지에서 숙박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즈하라 한 곳만 보려는 당일치기 관광객들에겐 모처럼의 ‘해외 관광’을 즐기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현지에서는 의외의 곳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즈하라 터미널에서 역사문화자료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수제 햄버거 체인점인 모스버거 가게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20여 명의 손님이 번호표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양파버거로 할래.” 가게 안에서 들리는 말은 대부분 한국말이었다. 한 여성 손님에게 “왜 일본까지 와서 굳이 햄버거를 먹느냐”고 물었더니 “서울 강남에 체인점이 생긴 뒤 줄을 서서 먹는다는 모스버거를 모르느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 그래도 여기서 먹는 게 오리지널 맛에 가깝지 않을까”란 말도 덧붙였다.

 바로 옆 티아라 쇼핑몰 역시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 고객이었다. 진열대 앞에는 ‘대마도 사케와 맥주’ ‘식용유와 참기름’ 등 물건 이름이 한글로 적혀 있었다. 수퍼마켓 레드캬베쓰의 직원 스에나가 사오리(末永沙織·25·여)는 “하루에 한국인 손님이 200여 명쯤 오는데 한 번 쇼핑하는 분량이 현지인보다 많다”며 "과일향이 나는 칵테일 음료 호로요이 등 최근 일본의 유행상품에 대한 정보도 한국 손님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무원이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영양제 등 약품류를 산 남성 관광객은 “최근의 엔저 현상으로 현지 물가가 부담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쓰시마 관광객은 처음 항로가 열린 1997년 이후 꾸준히 늘어 2008년 14만여 명을 기록했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6만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29만3200명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표 참조>

 최근에는 부산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쓰시마 여행을 위해 부산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여고 동창과 함께 부산을 찾은 이기민(27·여)씨는 “부산 서면에서 숙박하며 2박3일 일정 중 둘째 날 일정으로 쓰시마 당일 관광 코스를 잡았다”며 “2박3일 동안 2개국 여행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쓰시마 여행객이 불어난 것은 부산∼쓰시마 항로가 지난해부터 3개 선사 경쟁체제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 항로는 ㈜대아고속해운이 97년 독점 취항한 뒤 주 5회 운항했었다. 그러다 부산∼후쿠오카 항로에 다니던 ㈜미래고속이 2011년 10월부터 쾌속선 코비호를, ㈜JR큐슈고속이 비틀호를 투입하면서 3개 선사가 경쟁하기 시작했다. 요일에 따라 하루 세 편의 배가 출항하기도 한다.

 쓰시마 당일 관광의 가장 큰 매력은 값싼 경비다. 일부 여행사에서는 전용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돌아보는 7만9000원짜리 상품도 내놓고 있다. 점심·현지 교통비를 합쳐도 채 10만원이 안 든다. 대아고속은 17일까지 왕복 배삯만 1만원에 판매하는 이벤트를 펼친다.

 박은경(30) 여행박사 홍보팀 대리는 “특가 상품이나 면세 할인권(1만원)을 잘 이용하면 5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게 쓰시마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쓰시마에 처음 가는 사람은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오는 사람이 많고, 두 차례 이상 가는 사람은 쇼핑에 큰 비중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쇼핑 중심의 쓰시마 여행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쓰시마 전문 여행사인 발해투어 황백현 대표는 “겉핥기 식으로 대충 돌아보기 때문에 쓰시마 곳곳에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흔적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며 “매너를 지키지 않는 일부 여행객의 언행이 한국의 이미지를 흐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즈하라의 한 마트에는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듯 ‘부탁 말씀, 음식물 반입 금지’라고 한글로 적힌 안내판이 매장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신선식품 매장 앞의 얼음 공급대에는 ‘얼음이 부족합니다. 낚시용으로 쓰시면 안 됩니다’라는 한글 안내문이 굵은 활자로 적혀 있었다.

쓰시마=김상진·위성욱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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