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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겨울나무에게 배우는 수심<守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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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307호 27면

눈 덮인 겨울산행의 맛은 담묵 산수화의 그것처럼 여백과 무심의 진진함이다. 지리산의 순진한 곰처럼 춥고 미끄럽다는 핑계로 산을 오르지 않다 엊그제 날씨가 풀려 드디어 눈 쌓인 산으로 향했다. 함께 간 일행은 선수처럼 앞질러 올랐고 뒤처진 나는 고요와 새들이 떠난 나무들 사이를 저벅저벅 오르며 오붓한 맛을 느꼈다.

계곡에는 며칠 동안 밤에 내린 눈이 쌓였고 반대편 언덕은 바람에 휩쓸려 앙상했지만 등산화가 푹푹 빠지는 폭신한 눈과 적막감이 오히려 여유로운 휴식이었다. 가득 차 있으면서도 텅 빈 공간의 산에 가만히 귀를 세우면 골짜기 끝 쪽에서 울리는 조용한 소리가 있다. “똑 똑 똑~.” 바라보니 이름 모를 겨울새가 나무에 등산객이 지나간다는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굴뚝새나 오색딱따구리는 아닐까…’.

겨울산 매력은 텅 빔과 차갑도록 한가한 무심이다. 소나무의 독야청청함보다 더한 멋은 활엽수 굴참나무가 나목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자태다. 그늘진 오후에 휩쓸리는 알싸한 댓바람 소리도 이만한 호사와는 거리가 있다. 청정 소나무가 비록 눈을 이고 가지를 벌려 하늘을 가려 서 있다면 잎새를 내려놓은 나목들은 묵언 참선하는 스님들처럼 가벼운 마음의 비움이다.

한 해 살림을 거두고 욕심 없는 새들과 눈 속에 서서 허업(虛業)을 지키고 있는 풍광은 자연 속 인생의 모습이었다. ‘허업’이란 무엇인가. 가진 것, 바라는 것이 없는 수심(守心)이다. “나이 40이면 삶의 보따리를 챙겨 허업을 준비하고 서서히 실천하는 나이다”고 출가문에서 틈틈이 스승님은 일러주셨다. 덧붙여 하신 말씀은 “그 사람을 알려면 죽고 나서 관 뚜껑 닫아봐야 한다”였다.

욕심 없이 살았다고 해도 청문회 해보면 잘잘못이 다 나오듯, 비록 수행자라 하지만 그도 ‘관 뚜껑’ 닫아보면 그에 대한 공부심을 세상 사람들이나 수행자들이 말은 안 해도 다 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집착과 애착을 업으로 하고 그것이 자랑이지만 마음공부를 업(業)으로 하는 수행자들은 첫째가 남보다 잘 숨는(隱) 재주이고, 둘째는 허업에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묻는 것이다.

백두산 호랑이도 잘 숨어야 명물이며, 세상이 알아준다는 허세와 뜬 이름은 부모권속을 떠나 오직 마음을 밝히려 도가에 온 자에게는 헛수고 같은 등잔불 심지만 높일 뿐이란 뜻이다. 나무가 참선하고 기도하는 걸 보았는가?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인내다.” 낮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로 참선을 하고, 밤이면 떠났던 새들이 잔가지에 돌아와 잠든 모습을 보며 겨울나무는 그렇게 기도한다. 봉황정 정상에 오르니 먼저 도착한 등산객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태 전에 이 산을 오르면서” “이 앞산이 모두 내 것이여 하며 허세를 부리던 사람이 얼마 전에 영원히 산을 떠나갔어” 하는 말이 들린다. 그런데 안 들었을 것 같던 겨울나무도 같이 듣고 있었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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